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린리궈 (문단 편집) === 공군의 황태자 === 1945년, 옌안에서 린뱌오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예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라오후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누나 린리헝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과 달리 린뱌오와 예췬 부부는 린리궈를 거의 왕자처럼 애지중지 키웠다. 이후 [[베이징대학]] 물리학과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66년, 린뱌오는 정치국 후보위원 [[루딩이]]와 그의 아내 옌웨이빙이 린리궈가 린뱌오의 아들이 아니라고 음해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숙청하는 [[5.16 사건]]을 일으켰다. ||[[파일:린뱌오일가1.jpg]]|| || 어린 린리궈. 린뱌오와 예췬 사이의 사내아이. || 1967년 4월, 대학을 졸업한 린리궈는 23세에 인민해방군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사령관 우파셴(吳法憲)의 주선으로 공군사령부 당위원회 판공실 비서에 임명되었다. 1967년 7월, 린리궈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69년 10월 17일에는 공군 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겸 작전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여 우파셴의 수석참모가 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쳤다. 10월 18일, 우파셴은 불과 24살의 젊은이에 대한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발언을 남겼다. >"공군의 모든 일은 린리궈 동지에게 회보해야 하며 그는 공군의 모든 것을 움직이고 지휘할 수 있다." 1969년 10월 28일, 린리궈는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저우위츠, 공군사령부 판공실 처장 류페이펑,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처장 위신예 등과 함께 우파셴의 비준을 받아 <조사연구소조>를 수립하여 이를 공군직속기관으로 삼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1970년 8.1 건군절을 기념하여 린리궈는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고 활요하는 것에 관한 응용방법 해설보고>를 발표했고 우파셴은 이를 두고 "정치위성을 쏘아올린 것이나 다름 없다."고 칭송하며 린리궈가 "천재이고 온전히 발전한 인재이며 대세를 움직일 수 있는 인재"라고 아첨을 아끼지 않았다. 린뱌오도 아들의 보고에 대하여 "사상이 나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언어도 나와 비슷하다."고 추켜세웠다. 린리궈는 공군의 태상황이라 불리며 공군의 모든 사업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1년에 병사, 2년 만에 당원, 3년 만에 부부장, 4년 만에 태상황."이라며 빈정댔다. ||[[파일:린뱌오일가2.jpg]]|| || 가족들과 함께 있는 린리궈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