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히텐슈타인 (문단 편집) == 역사 == 이 지역은 본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직할영지였으나,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한스 아담 1세가 제국의회 참가자격을 얻기 위해서 셀렌베르크 남작령(Herrschaft Schellenberg, 1699)과 황제 직할 영지인 파두츠 백작령(Grafschaft Vaduz, 1712)을 구입하여 합쳤다. 그 뒤 17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의 윤허로 공국(Fürstentum)의 지위를 얻어 리히텐슈타인 공작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혁명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의 봉신국으로서 참전했다. 당시 리히텐슈타인 공은 오스트리아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였으며, 그는 기병 2,000기를 이끌고 보병 7,000여 명 규모의 일개 군단을 격파하는 무쌍을 벌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가, 1806년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1815년 [[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등, 이리저리 돌다가 [[1866년]] 정식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이 무렵의 군주인 요한 2세(별명은 "선하신 공 요한(Johann II der Gute)")는 70년간 재위하면서(1858~1929년) 유럽 주권국의 군주 중에선 [[실제로 장수한 군주|두번째로 오래 재위했다]].[* 첫 번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다만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까지 합치면 순위는 한참 내려간다.] 본래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하인 탓에, 1866년 이후로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화폐를 사용하고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도 [[빈(오스트리아)|빈]]에 거주하는 등, 일종의 오-헝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 이후 오-헝 제국이 붕괴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이후 1921년 신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으며 이전(1852년)에 오스트리아와 맺었던 관세동맹을 폐지하고, 새로이 스위스와 관세동맹 (1919년)을 맺고 [[스위스 프랑]]을 기본통화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1938년 이후로는 공가도 리히텐슈타인에 살게 되었다. 당시 공비 (프란츠 1세의 후처) [[https://en.wikipedia.org/wiki/Elisabeth_von_Gutmann|엘리자베트]]가 '''[[유대인]]'''이라 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현존하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제후국'이다. 한편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는 [[체코슬로바키아]]에 1,600㎢가 넘는 [[영지(역사)|영지]](리히텐슈타인 영토의 열 배, 트로파우 공국)를 가지고 있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가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면서, 이후 체코 당국에 이를 반환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그래서 리히텐슈타인은 [[체코]] 및 [[슬로바키아]]와 외교관계가 없었다가, [[2009년]] 뒤늦게 수교했다. 리히텐슈타인 공가의 [[종가]]는 오스트리아에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한 저택으로 어지간한 궁궐보다도 크다. 현재는 상당 부분 외부에 개방되어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고. 리히텐슈타인 대공이 1년에 2번씩 종가에 방문하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빈]]에 있는 공가는 관광 불가능하게 막힌다. 관리자가 리히텐슈타인 대공 본인 앞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아하니 실질적인 [[월경지]]같은 역할인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