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효순 (문단 편집) === 갑산파 사건 이전 === 1896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1939년 2월 33세라고 공판기록에 기록되었으며 북한에서 밝힌 기록을 보면 1907년 생이다. 앞선 공판기록은 한국식 나이로 보인다. 함경북도 길주군 대홍면에서 태어났으며 동생 리제순(1910~1945)이나 나중에 [[갑산파]]를 결성하게 되는 박금철, 리송운, 김왈룡과는 달리 조국광복회 활동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으나 길주에서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는 등 반일운동을 하였다. 1935년 김일성의 빨치산 항일유격대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혜산사건으로 투옥되어 1939년 2월,치안유지법위반, 출판법위반, 주거침입 교사, 절도 교사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해방 후에 출옥하고 즉시 월북, 길주군당 위원장을 거쳐 청진시 부위원장이 되었다가 1948년 3월 북로당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함경북도 인민위원장을 거쳐 남북로동당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완성된 이후 자강도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11월 전원회의에서 허가이가 비판을 받고 실각한 이후 조직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반탐오, 반낭비, 반관료주의 운동이 진행되던 와중에 대부분의 인민위원장과 당위원장들이 교체되었음에도 자강도 인민위원장 유임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전임 검열위원장 [[김응기]]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조동됨에 따라 신임 검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11월, 몽골인민혁명당 12차 당대회에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몽골 수상 [[욤자깅 체뎅발]]과 만나 리셉션을 하는데, 내외를 하던 리효순이 체뎅발이 자신의 아내 아나스타시야 필라토바를 소개해주는데도 훽 지나쳐서 남자들과 인사를 다 나눈 후에야 아나스타시야와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를 수행했던 장학봉 장군이 이를 지적하자 그들은 그들 법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 법대로 살면 되지 않은가? 서로 존경하고 위법하지만 않으면 된다 라고 했는데 장학봉은 그런 리효순이 참 순박하다고 평했다. 1955년 8월 5일, [[최창익]]의 뒤를 이어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어 반탐오, 반낭비 운동을 총지휘하면서 소농, 소상인들을 조졌다. 리효순은 수차례 로동신문에 논설을 게재하면서 탐오, 낭비분자, 부르주아 이기주의자들을 쳐없애 일제 사상잔재와 자본주의적 영향을 퇴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북한의 사회주의 개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55년 11월 29일, [[김익선]]에게 국가검열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반탐오운동의 공으로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림해에게 검열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한상두]]의 뒤를 이어서 간부부장으로 영전하였다. 한상두는 조직지도부장으로 이동하였다. 1956년 2월, [[최용건]], 황해북도 당위원장 [[허빈]], 소련대사 [[리상조]]와 함께 소공 20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으로 파견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 후보위원, 검열위원에 선출, 간부부장에 유임되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 및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간부부장 자격으로 "장기간의 반일민족해방투쟁과 해방 후 조국의 통일독립과 공화국 북반부의 민주기지를 강화하는 사업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50세 기념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7년 12월부터 1958년 1월까지 진행된 각도농업협동종합열성자대회에서 최용건, 박정애, 김일, 남일, 김창만, 림해, 리종옥과 같이 농업 협동화를 매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도 박금철, 김일, 김경석, 김영주와 함께 칼날을 휘둘러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류축운 등을 숙청하였다. 리효순은 자신은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는 한편, 간부부가 폐지되고 행정부로 개편되면서 행정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직맹위원장 한상두가 금속공업상으로 이동함에 따라 후임 직맹위원장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에 임명되어 [[천리마 운동]]을 지휘하였다. 후임 행정부장에는 행정부 부부장 [[김경석]]이 임명되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일(1910)|김일]], [[박정애]], [[김달현(1884)|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평양시 당위원장 [[리송운]]이 1960년 2월, 소련 대사로 부임하면서 잠시 후임 평양시 당위원장을 지냈으나, 1960년 5월, 대남총국이 조직되면서 대남총국장에 임명되었고 이 때문에 평양시 당위원장에서 해임, [[김경석]]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1년 5월, 조평통이 출범하자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8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박금철, 김창만과 함께 토론자로 참석하여 대남부분을 담당하였고, 정치위원회 위원 및 대외사업 담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황태성 사건]]으로 남조선국이 해체되면서 국장에서 해임, 직총 위원장으로 다시 이동했다고 한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3기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4월, 대남총국이 다시 설치되면서 대남사업총국장에도 임명되어 1960년대의 대남사업을 총지휘하였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장, 1965년 3월, [[안재홍]] 장의위원, 1965년 7월, [[정로식]] 장의위원, 1965년 12월, [[서채순]] 장의위원장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