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콴유 (문단 편집) === [[권위주의]]적 통치 === >만일 간디가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부에 대항하는 대중적인 불복종 운동을 이끌었다면, 그는 이 아시아인 수상이 이전의 서구 수상보다 더 가혹한 지배자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틀림없이 감옥의 높은 장벽 뒤로 간단히 사라졌을 것이다. >---- >T.J.S 조지[* Thayil Jacob Sony George, 1928~, 리콴유의 전기를 저술한 적이 있는 인도의 언론인. 이 사람도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내가 한 모든 것이 옳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한 모든 것은 명예로운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재판 없이 동료들을 가두는 나쁜 짓을 해야 했습니다. >---- >리콴유, [[2010년]]에 [[뉴욕 타임즈]]의 세스 마이단스(Seth Mydans)와 한 인터뷰 중 리콴유가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 연도 || 지지율 || || 1968년 || 86.7% || || 1972년 || 74.1% || || 1976년 || 77.7% || || 1980년 || 64.8% || || 1988년 || 63.2% ||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20세기 중반부터 싱가포르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1965년]]부터 [[1981년]]까지의 싱가포르는[* 이 시기에 국회의원 선거를 총 4번(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치렀다.] [[야당]]의 존재를 허용했음에도 싱가포르 의회의 모든 의석을 [[인민행동당]] 한 당이 독차지하여 이 시기의 싱가포르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나 다를 바 없었다. 1981년에 있던 보궐선거에서야 야당이 한 선거구에서 승리해 의석을 차지했고[* 당시에 이 안손 선거구에서의 선거에서 우승한 후보는 [[싱가포르 노동당|노동당]] 소속의 J.B. 제야렛남(Joshua Benjamin Jeyaretnam, 1926~2008)이었다.] 그리고 [[1984년]]에 있던 총선에서야 싱가포르의 야당은 79석의 의석 중 무려(?) 2석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의회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싱가포르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렇다 할 [[부정선거]] 의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야당에 대한 우회적인 탄압은 상당히 자주 이뤄졌기에 야당이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을 비판하거나 위협하기 어려웠다. 덤으로 리콴유는 이후에도 타 정당이 당선된 국회의원 지역구에는 예산을 깎기까지 했다. 인도의 언론인 T.J.S 조지가 [[1973년]]에 저술한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1988년에 남도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리콴유의 인권 탄압은 '당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아시아의 나라들 중 싱가포르만큼 분노를 자아낸 데는 없다'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단의 내용들은 이 책에 소개된 리콴유 집권 초기에 있었던 인권탄압 목록들이다. 당시 싱가포르의 정치범들은 가족들과 변호사와의 면회, 독서를 사실상 금지당한 채 독방에 감금당하거나 고문까지 당했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고문의 폭력성은 덜했다고는 하지만, 환각제를 투여당한 정치범들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의사가 이들을 치료하는 것도 허용되지 못했으며, 석방된 후에도 경찰의 감시 하에 직업 활동과 외출에도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해외 출국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에 [[엠네스티]]가 파견한 영국 국적의 여성 조사관 에스트렐라 카레라스(Estrella Carreras)는 출국 후에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재입국이 금지되는 등 리콴유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외국인들은 언론인, 교수 가릴 것 없이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그리고 리콴유는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치안유지법(Internal Security Act)과 사회안전법(Preservation of Public Security Ordinance)을 오히려 식민지 시절보다도 강화시켜,[* 참고로 식민지 시절에는 사회안전법이 상당히 온건하게 적용되었다고 한다.] 정적들과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영장 없이 임의로 체포하고 재판 없이 무기한 감금했으며, 이러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리콴유 집권 시기에 재판 없이 구금된 사람들은 1,600명 이상이었고,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에서 수감된 정치범 수는 915명에 달했다고 한다.] 1968년부터는 아예 노동자의 파업을 법적으로 금지했으며, 1969년 4월 중순부터 12월까지는 리콴유가 직접 지시를 내려 싱가포르의 개정된 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1970년에 리콴유는 교수들 앞에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외국인 교수들에 대해 '철새들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며 비난하고 '강의 내용이 싱가포르의 국정 방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정치학과, 사회학과, 철학과를 폐쇄하겠다'는 위협까지 가했다. 리콴유에게 반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은 대학교에서 쫓겨났다.[* [[고촉통]] 총리 시기에도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1845년에 창간된 싱가포르의 최대 신문사)에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대학 교수가 공금 횡령 혐의로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그 '공금 횡령'이라는 게 실제로는 '복사기 불법 사용'을 과장해서 발표한 것이었다고 한다.] 덤으로 리콴유는 '군사화된 생활 방식에 의한 국가 건설의 잠재력'에 매력을 느끼고는 싱가포르인들을 군대 및 경찰간부 훈련단, 싱가포르 소년단, 대학 분견대, 교련단 등 여러 획일적인 조직들에 가입시켰는데, 실제로 당시 싱가포르는 훈련과 가두 행렬이 일상화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싱가포르의 '전시민의 군인화'는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파파도풀로스]]의 그리스'를 연상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T.J.S 조지의 리콴유 전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을 더하자면, 리콴유 시기 싱가포르에서는 정치범들이 자백하는 모습이 TV에 공개적으로 중계되었으며, 이 책의 출판 이후 시점인 1978년자 엠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싱가포르는 UN 회원국임에도 인권 조약에 서명하거나 비준하지 않았다고 한다. 덤으로 사회적으로도 엄격한 통제가 가해져 '소위 히피족이 싱가포르인의 정신을 부패시키고 싱가포르 사회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명목으로 남성의 [[장발]]을 금지시키고 이를 외국인 관광객에게까지 적용해 머리가 윗옷 칼라를 넘으면 싱가포르 입국을 제한하거나 비행기가 싱가포르를 경유하기만 할 뿐이라도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했으며, 만약 이들이 장발을 그대로 놔둔 채 싱가포르를 떠나면 몇 달 동안 재입국을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클리프 리처드]]나 [[레드 제플린]], [[비 지스]]처럼 장발을 가진 외국인 가수들은 예정된 싱가포르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기업에서조차 장발족에 대한 차별 대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여교사들마저 어깨 밑으로 내려가는 머리와 파마가 금지되었고, 문화부장관은 정부의 두발 정책에 반대하는 대학생에 대한 징집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적어도 1973년부터는 시위를 막기 위해 밖에서 10인 이상이 모이는 것까지 금지시켰으며, 오늘날에도 싱가포르에서는 도심 공원 한 곳에서만 시위가 가능하다. 이 곳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은 시위가 허용된 것이 2000년 9월이었고, 자유로운 시위는 무려 '''2008년''' 9월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리콴유가 집권한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은 약 4.69였다.[* 정확히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는 평균이 5(PR 5+CL 5)였고,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평균이 4.5(PR 4+CL 5), 1989년과 1990년은 평균이 4(PR 4+CL 4)였다.] 참고로 [[전두환]] 시기 [[대한민국]]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약 4.86이었으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기 [[필리핀]]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리콴유보다도 '''높은''' 약 4.64였다. 물론 리콴유는 이 둘과는 달리 자신의 반대파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자국민을 상대로 학살을 저지르는 일은 집권 기간 동안 '''__전혀__''' 하지 않았다. 리콴유는 개인적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타입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자체는 칭찬할 일이지만, 독재와 개인의 청렴성은 무관하기 때문에 충분한 방어의 근거는 되지 않는다. 돈을 사용함에 있어 청렴하지 못함은 사람의 부패를 가늠하는 여러 기준 중 한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에서 악명이 높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사적으로는 청렴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기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고,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도 이전부터 살던 조지아의 허름한 옛집에서 계속 살다가 타계했다. [[마오쩌둥]] 또한 자신의 후광만으로 자녀들이 높은 정치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었고 마오의 자녀들은 모두 정치와 관련없는 직업에 종사했다.] 현재 싱가포르에서 이권이 따르는 국영기업이나 관변단체의 수장, 또는 정부 요직들은 상당부분 리콴유 일가나 그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으로 싱가포르 여러 대기업의 지주회사이자 전 세계 여러곳에 투자를 하고 있는 '''국영기업''' '[[테마섹|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그의 '''며느리'''이자 리셴룽 총리의 부인인 호칭(何晶) 여사다. 물론 이들은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업들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정경유착|지도자의 친인척이 국가 공기업 사장으로 있는 것]]이 적절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에서도 리콴유의 통치를 독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리콴유 옹호자들이나, 독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우호적으로 보는 옹호자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경제기반은 부유하되 자유와는 동떨어진 사회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독재정치에도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사회안정을 이룩했다는 점때문에 주변국 독재자들에게도 나름대로 영감을 주기도 했고,[* 물론 비단 리콴유만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다만 스탈린 격하 이전에는 스탈린이 가혹한 독재정치를 펼쳤음에도 소련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점 때문에 세계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상당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 특히 [[중국]]도 싱가포르가 일당독재체제 아래에서 사회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점때문에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펼칠때 싱가포르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실제로 [[덩샤오핑]]과 리콴유는 사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고, 이후로도 리콴유과 [[장쩌민]], [[후진타오]]와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사실 말레이시아는 1957년부터 2018년까지는 야당세력이 싱가포르에 비해 강했기는 했지만 어쟀거나 국민전선(BN)이 권력을 독식했던 국가였고 비록 말레이계 우대정책 때문에 갈라섰다고는 하지만 막상 이후의 경제정책들을 보면 반공주의 등 리콴유 시절의 싱가포르와 정치적인 성향면에서 비슷한 면이 많았다. 또한 인도네시아도 1998년에 민주화 되었지만 [[수하르토]] 집권기때는 독재국가였으며[* 실제로 리콴유는 수하르토와 서로 절친한 관계였다. 실제로 리콴유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경제 성장은 수하르토 씨의 정책, 안정성과 경제에 대한 초점 덕분'이라고 여겼으며, 수하르토도 리콴유를 '명확하게 말하고 신뢰할 수 있고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는 친구'로 호의적으로 평가했고, 덤으로 수하르토 치하의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 개발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에도 여러 번 참여하기도 했다. [[https://www.straitstimes.com/opinion/lee-kuan-yew-and-suharto-friends-till-the-end|참고자료]] 리콴유가 [[화교]] 후손이었던 것에 반해 수하르토가 화교를 탄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점이다.] 태국도 수시로 군부독재정치가 펼쳐지고 캄보디아도 [[훈 센]] 독재체제에 베트남과 라오스도 일당독재체제이니 한번쯤은 참고할 만한 모델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