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콴유 (문단 편집) === 싱가포르의 국부가 되다 === >역사상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일부 지도자들의 능력과 그들이 이끄는 국가의 국력 간에 전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 >[[헨리 키신저]] 독립 후 리콴유는 우선 순위를 정하여 국가개발에 힘을 쏟았다. 특히나 제일 중요시 여긴 것은 군대 양성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에 병합되어 안전을 확보한 뒤 자치권이 확보된 하나의 독립된 자치주로 살아가기를 원했었다. 특히 이 과정 가운데 [[화교]]가 축출당하면서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될 당시에 말레이시아 정치인 가운데에는 싱가포르가 합병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중국인들을 내쫓고 [[말레이인]]만 있는 싱가포르를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부터 중국계인 리콴유는 이런 식의 합병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고 [[인도네시아]]도 호시탐탐 싱가포르를 노렸기 때문에 리콴유는 군대 양성에 열을 올렸다. 사실상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데다가 이전에 주둔해 있던 군대는 대다수가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고 남아있는 군대도 말레이 민족의 특색이 강했던터라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로 1967년에 국가예산 당 국방비 비율이 7%였던 것이 1972년에는 무려 '''38%'''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며, 이 돈의 대부분은 [[싱가포르군]]의 무기 체제 개선에 사용되었다. 다만 군대가 바로 만든다고 되는게 아닌지라 일정 기간동안 [[영국군]]의 보호 아래에 있었으며[* 원래는 영속적으로 [[영국군]]의 보호를 받길 원했으나 [[1970년대]]에 [[영국병|영국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이 또한 굉장히 어려워졌다.], 이후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영국과 밀접하면서도 영국이 아닌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비슷한 상황(중동의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군대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식 군제를 따르면 최소한 20년이 걸릴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현재도 싱가포르는 [[대한민국]], [[홍콩]]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은 나라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습성과 더불어 리콴유의 피나는 노력이 있던 탓이다. 이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이 가운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있다. 바로 리콴유를 지배한 법칙인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였다. 그는 모두가 잘해서 모두가 [[복지]]를 누리고 다같이 잘사는 방법은 자원이 많거나 역사가 깊은 나라에나 가능하지 싱가포르에는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리콴유는 학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최대한 분리하는 대신 교육을 상위 10%에 집중투자하는 방법으로 경쟁에 불을 붙였다. 모든 시험과 관문에서 상위 10%만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직장에 진학하는 체제가 강한데 어느정도냐면 리콴유는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전국모의고사를 보면 전체 평균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직 상위 10%가 어느정도의 절대적 성과를 올렸는가만 관심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기준에 맞추어 교육체제를 정비하여 [[1957년]]에 52%였던 싱가포르의 문해율이 [[1990년]]에는 90%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대학도 열심히 손봤으며, 그 덕분에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대학이자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는 명문대가 되었다. 또한 경제발전에 항상 골몰했다.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잘나가는 항구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의 거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밝혔다시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시점에 이미 싱가포르는 교역항으로의 이점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했다. 왜냐면 주변에 대체 항구들이 즐비했고, 특히나 싱가포르를 내쫓으면서 이미 말레이시아는 다른 항구([[조호르바루]])를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키워놓을 계획을 수립 중에 있었고 인도네시아 또한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위치를 주장하며 물류 교역의 중심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 단순히 물류의 거점만 내세우며 살기에 싱가포르가 가진 장점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중한 것이 산업화였다.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을 거친 후에 물건을 파는 것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나라에 비해 근면하고 신뢰도 높은 국민성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고 인종 통합에 골치를 썩으며 정부의 부패에 휘둘리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빌빌대는 동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독선적이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무역의 거점이 되어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이러한 중개무역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허브로 위치하는 것과 관광산업 또한 밥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현재의 싱가포르는 홍콩, 도쿄와 더불어 금융의 중심지이자 조그만한 섬나라 치고는 말도 안되는 관광 인지도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다.[* 비록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이 앞장 섰으나 1997년 아시아 금용위기 이후 싱가포르, 홍콩이 일본의 1인당 GDP를 앞섰다. 현재도 그러고 있다.] 그 결과 싱가포르의 GDP는 [[1960년]]에 7.1억 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1990년]]에 361.4억 달러가 되어 30년 만에 '''51배'''나 증가했고 3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했다. 물론 1인당 GDP도 비슷한 시기에 428달러에서 11862달러로 28배 가까이 증가하여 리콴유는 집권기간 동안 고국을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증진시킨 세계의 유일한 지도자로 간주된다.[* 이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전체 GDP는 72.4억 달러에서 834.6억 달러로, 1인당 GDP는 4,364달러에서 27,394달러로 증가한 셈이다.] 싱가포르는 이미 1968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기긴 했으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에야 본격화되는데, 1970년 기준으로 926달러도 되지 않던 1인당 GDP가 1981년에는 5596달러를 기록, 싱가포르는 1980년대 초에 드디어 선진국 진입에 성공하게 된다.[* 1981년 당시 1인당 GDP 세계 평균이 2594달러에 불과했다.] 사회적으로도 1960년으로부터 1990년까지 기대수명은 65세에서 74세로, 전화 보급율은 3%에서 38%로, 관광객 수는 10만 명에서 53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업적들로 인해 [[중국]]의 [[덩샤오핑]]은 22,000명이 넘는 관리들을 싱가포르에 파견해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을 배우고자 했으며, [[르완다]]의 [[폴 카가메]]의 정책도 리콴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외환 보유고를 관리하기 위해 1981년에 싱가포르 정부 투자 공사를 설립했는데, 이렇게 마련한 기금을 통해 1997-98년에 있던 [[1997년 외환 위기|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싱가포르는 통화를 보호하며 안정적인 환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리콴유는 "'''국민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상초월의 방법들을 생각했는데 사실 2010년대에 들어 얘기한다면 돌 맞을만한 얘기들이었다. 싱가포르의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제도는 오늘날에도 유명하지만[* 그의 자서전인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런 모습이 현재의 [[싱가포르]]의 [[태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정도는 리콴유가 재임 기간 동안 추진했던 정책에 비하면 굉장히 양호하다. [[1959년]]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 참고로 세계 최연소 수상인 [[캄보디아]]의 [[훈 센]]이 만 32세에 총리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리콴유는 매우 이른 나이에 집권한 셈.] [[1990년]] 11월 28일에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하였으며,[* 사실 리콴유의 집권 당시에 외국에서는 종신 총리를 예상하는 여론도 있었다. 사실 종신 총리로 집권했으면 그 [[피델 카스트로]]보다도 긴 장장 '''56년(!!)'''이나 국가원수로 집권했다는 대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후임으로 [[고촉통]](吳作棟)이 집권한 후에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의 지위로서 '실질적인 총리는 리콴유'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으며,[* 다만 고촉통도 14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면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하기는 했다.] 2004년에는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 한국언론에서는 대부분 '고문장관'으로 표기했다. [[http://overseas.mofa.go.kr/sg-ko/brd/m_2510/view.do?seq=695951&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page=5|주 싱가포르 한국대사관]] 역시 고문장관이라고 표기. 선임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 정부에서 한국 신문에 실은 싱가포르 홍보광고에서는 '''스승장관'''이라고 표기했다.]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 5월 21일에 리콴유는 고촉통과 함께 각각 내각고문과 선임장관에서 물러나며 권력에서 완전히 은퇴했는데, 이는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은 성명을 통해 "총선 이후 새로운 정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서 "리셴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