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콴유 (문단 편집) ===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 [[파일:external/i302.photobucket.com/lky-cries.jpg|Width=700]] >'''싱가포르 축출되다''' >부서져버린 꿈... 이제는 각자의 길로 [youtube(mvijGLt5ulc)] 당시 영상. 1965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은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하였고, 싱가포르는 독립하게 된다. 리콴유와 그의 정부 각료들은 8월 7일에 [[툰쿠 압둘 라만]]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았다.[* 라만과 리콴유는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 많이 대립했지만, 라만과 리콴유의 개인적인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은 독립을 위해 함께 한 동지였다. 그래서 라만은 리콴유에게 "우리가 하나의 연방에 있을 때는 적이었지만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다른 독립된 국가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친구이자 동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8월 9일에 말레이시아 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싱가포르 축출안을 가결했고, 같은 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립을 선포했다.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혹'이라고 인식했다.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간 이후로도 1969년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중국계 야당이 약진하는 일이 벌어지자 폭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계엄령이 몇년간 실시 된 뒤에 말레이계 주민에 대한 우대정책이 시행되어 화교와 인도계에 대해서 차별정책을 진행하였다. 몇몇 화교계 가문이 재계를 지배하며 원주민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필리핀]] 같은 나라를 보면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의 주류를 이루는 화교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콴유는 독립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몇백만 명의 시민들을 저버릴 셈이냐고 호소하기도 했으며,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당한''' 것을 가장 가슴 아프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때라고 회고하였다.(디스커버리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편 참조) 리콴유는 직접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강제 독립 당시의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군대 없고, 자원 없고, 땅 없고,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등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 국가[* 싱가포르가 번영한 항구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레이 반도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번영이었다.]에 불과한 상황에서 축출당했을 때의 서러움은 정말 심각하여 영연방의 기억을 되살려 영국에 빌붙어 볼까 아니면 말레이에 다시 어떻게 붙어볼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기밀해제되어 공개된 고켕스위에게 보낸 편지와 고켕스위가 작성한 메모를 보면 말레이시아 연방 시절 리콴유는 본인이 내키든 내키지 않았던 결국 싱가포르가 독립하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기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리콴유는 독립한다는 전제 하에 최대한 싱가포르가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고 독립 이후에 발생할 충격을 최대한 완화하기 위해서 말레이시아 측과 상호 동의하에 축출당하는 것처럼 연출하기로 미리 합의했다고 한다. 리콴유 정부는 [[1965년]] [[7월]] 고켕스위를 말레이시아 중앙정부에 보내 최종적으로 분리 독립에 합의했으며, 기밀 해제된 문서를 볼때 이미 독립 이후에 어떻게 해야할지 대강의 계획은 세워뒀던 것으로 보인다.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 합의해 분리독립한다는 계획을 극히 일부 각료들끼리만 진행하고 다른 각료들에게는 비밀로 한 탓에, 말레이시아 정부가 싱가포르 축출을 통보한 날인 8월 7일 아침에서야 리콴유에게서 독립 계획을 전해듣고 크게 반발한 각료들도 있었으나 이미 대세를 뒤집을 순 없었다.[[https://eresources.nlb.gov.sg/history/events/dc1efe7a-8159-40b2-9244-cdb078755013#1|관련 자료]] 리콴유는 독립 당시 주변 대국, 특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을 두려워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할 때도 모든 말레이시아 정치인들이 싱가포르의 축출을 원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계를 몰아내고 싱가포르 땅을 차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싱가포르는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었으므로 말레이시아가 [[잠가라 밸브|행여나 마음만 먹는다면 싱가포르로의 식수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마하티르]]가 2018년 재집권한 뒤 상수도 공급계약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며 식수공급중단 카드를 내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이후 초고속의 경제성장을 겪으면서도 리콴유는 이러한 식수공급의 중단을 매우 두려워했다. 특히나 말레이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여 싱가포르의 축출 혹은 강제 병합을 외치는 강경분자들의 힘이 세질 때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그 때마다 [[엘리전]]을 통한 무력행사를 불사하며 싱가포르의 식수공급 중단 사태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도 말레이시아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지맛 정수 시설이 전세계 최고 수준인 싱가포르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한 물을 싱가포르에서 정수과정을 거치고 병에 담고 포장해 역으로 말레이시아에 물을 되팔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부자들은 싱가포르에서 수입된 물만 먹는다. --여타의 개발도상국들이 그렇지만 병에 담긴 생수라고 해서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 특히나 가격이 저렴할수록 위험하고 가격이 비싸질수록 먹을만하지만 여튼 조심해야 한다.--] 또한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반서방주의자로서 친서방 국가였던 말레이시아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리콴유는 독립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하면서 말레이시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이렇듯 싱가포르의 독립은 마냥 급작스러운 것은 아니었고 리콴유 역시도 대비는 했으나, 마냥 상황이 내키지는 않았는지 이후로도 계속 안타깝다는 식으로 표현하곤 했다.[* [[신계(홍콩)|옛 영국령 홍콩 당시 신계 지역]]을 영국이 추가적으로 장악한 이유, 그리고 홍콩 반환 당시 홍콩 전역을 모조리 반환하기로 한 이유를 대입해보면 답이 바로 나온다. 싱가포르는 홍콩으로 치면 이 신계 지역을 제외한 초창기의 영국령 홍콩이 통째로 타국으로 갈라져 나온 격이기 때문이다. 또한 리콴유 역시도 연방 잔류파였다. 축출 여론이 연방 전체에 걸쳐 대세였던 탓에 결국 잔류 노력을 접었을 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