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커창 (문단 편집) === 경력 === [[안후이성]] 출신이지만,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서 [[허베이성]]에서 자랐다. [[1974년]]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고교 졸업생들은 지식 분자로 간주되어 [[농촌]]에 배치되어 삽질을 하게 되었다. 리커창도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몇년간 삽질을 했다. 이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 대혁명이 끝나자 중앙으로 올라와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공계]] 출신이 주름잡던 다른 총리들과는 달리[* [[사관학교]] 출신인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와 상업 학교를 다닌 [[화궈펑]], 고졸인 [[자오쯔양]]을 제외하면 역대 [[중국 총리]]들은 모두 이공계 [[기술관료]] 출신이다. 앞의 셋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기 이전 혼란기에 입당한 사람들이니 중국 공산당 체제가 자리잡은 이후 세대의 총리는 모두 이공계 출신이다. [[문화대혁명]] 때문에 인문사회과학 분야 인재풀 전부가 리셋되었기 때문이다. 리커창의 후임인 [[리창]] 현임 총리도 저장농업대학에서 농업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법, 경제학과 출신이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리커창이 77학번으로, 문화대혁명으로 오랫동안 대학입시가 중단된 이후 치러진 입시를 통해 입학한 첫 세대였기 때문.[* 당연히 오랫동안 대학입시가 치러지지 않던 상황이었던지라 이 입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다고 한다. 그 입시를 뚫어낸 것.] 당연히 이 학번은 이후 중국을 이끌어나갈 선두주자로 주목을 받았는데, 리커창은 그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재학 중에 학생회장을 맡고, 82년 베이징대학 공청단 서기를 역임하게 된다. 리커창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당 고위간부들이 참여하는 공청단 행사를 주관하는 유명인사로 [[공청단]] 파벌의 선두주자 자리를 예약해둔 상황이었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법대를 수석졸업, 사시에 수석합격한 뒤 법원이나 검찰에서 잘 나가는 코스만 밟은 엘리트와 비슷한 길을 걸은 셈이다.] 이어 83년에는 공청단 서기국에 들어가고 92년에는 공청단 제1서기로 등극하며 만 37세에 장관급 인사가 된다. 이런 고속승진의 배경에는 공청단 대선배로서, 덩샤오핑에 의해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지명받은 [[후진타오]]의 후원이 있었다. 관리 생활 중에도 학업을 병행하여 [[199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이 [[논문]]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 관련 상인 쑨예팡(孙冶方) 상을 받았다. 1998년 15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중공중앙|중앙위원회]]에 입성[* [[시진핑]]은 16차에 입성했으니 심지어 시진핑보다도 5년 빨리 입성한 것이다. 리커창의 이례적으로 빠른 출세를 보여주는 것. 이런 고속출세는 명문대, 공청단 출신 중앙 엘리트들의 특성인데, 그러다보니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경쟁자들에 비해 현장을 모르고 자기 세력을 만들 줄 모른다는 악평을 듣기도 한다. 현장 실무경험 없이 중앙 요직만 맡다가 장차관급으로 승진한 뒤 낙하산으로 각 성시의 지도자로 부임하기 때문. 오히려 통념과는 달리 시진핑, 리잔수, 보시라이 등의 태자당 정치인들이 시골동네 현서기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승진사다리를 올라 현장경험이 훨씬 풍부하다. 시진핑은 대학 졸업 후 3년간 중앙군사위에 근무했던 것을 빼면, 82년부터 07년까지 무려 25년간 지방에서 공직자 생활을 했다. 그 기간동안 구축해둔 지방 인맥들이 나중에 시진핑의 권력 장악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고위공직자 부모의 후원 하에 꾸준히 군 관련 경력을 쌓은 태자당 출신들과는 달리 공청단 출신들은 군과 연이 없던 것도 큰 약점이었다.]하고, [[1999년]] [[허난 성]] 성장([[대한민국]]의 [[도지사]])에 지명되었는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44세로 최연소 성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부 지역[* [[베이징 시]], [[상하이]], [[선전(도시)|선전]] 등.] 급격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중부 내륙 지방인 허난 성의 경제를 이끈 공을 인정받았다. 단, 허난 성의 [[에이즈]] 창궐 관련 문제는 그의 치적에 있어서 옥에 티가 되었다. 이후 [[2004년]] [[둥베이|동북]] 지역의 [[랴오닝성]] 당서기를 맡았다. [[랴오닝성]]은 중국판 [[러스트 벨트]]로 개혁 개방 전까지는 공업 지대로 유명했으나,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쇠락한 지역인데, 이 지역에서 국유 기업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다만, 허난성에서의 에이즈 문제도 그렇고,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면서 인상적인 업적을 남겼던 [[왕치산]]이나 [[왕양]]에 비해 지방정부 책임자로서의 실적은 다소 애매하다는 평이 많았다. 그럼에도 공청단 제1서기 출신으로 후진타오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최연소 지방 지도자라는 타이틀 덕에 이 시점에서 리커창은 차기 지도부 입성은 당연히 확정된 상황이었고, 심지어 외부 관찰자들이 보기에는 [[후진타오]]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가주석]]과 [[총서기]] 자리를 이어받을 유력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졌으나 2007년 상하이 서기로 깜짝 발탁된 시진핑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며 기류가 달라지게 된다. 같은 해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서열 6위의 국가부주석과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맡고, 리커창은 서열 7위의 국무원 상무[[부총리]]를 맡아[* 실제 선출은 2008년 전인대에서 이뤄짐] 후계구도에서 시진핑의 우위가 확정되게 된다. 이는 리커창의 총서기 등극만큼은 막으려는 상하이방의 적극적인 비토와, 모두가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시진핑을 중재안으로 제시한 쩡칭훙의 기지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2010년 시진핑이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지명되면서 후계자 경쟁은 종료되었고, 서열 차이를 뒤집지 못하고 [[2013년]] 최종적으로 [[중국 총리|국무원 총리]] 자리에 올랐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권력 확대로, 전임 총리 [[주룽지]]나 [[원자바오]]에 비해서는 존재감이 미약하다. 전임 총리였던 주룽지는 [[마오쩌둥]] 시절 두 번이나 [[숙청]]되었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이나 소신이 뚜렷한 인물이었고, 원자바오는 국가주석 [[후진타오]]가 오히려 리커창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던 데다가 서로 [[러닝메이트]] 관계여서 존재감이 꽤 있었지만 리커창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에게 모나지 않게 출세하는 관료 스타일이기 때문에 시진핑의 [[카리스마]]에 눌려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듯하다. 상무위원 숫자가 7명으로 줄어들면서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상무위원이 될 것으로 여겨졌던 공청단파의 동료 리위안차오와 왕양이 둘 다 탈락해버렸기 때문에, 상무위원단 내에 공청단파는 본인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 존재감 역시 옅어질 수밖에 없던 것. 그래도 [[신문연파]]를 보면 ~~또한 [[이순자]]처럼~~ 두세 번째 소식으로는 꼭 나오기는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기업을 신경써달라 하였는데 리커창이 [[중국 국무원|행정부]] 내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대외정책의 영역인 [[THAAD]] 대응책은 본인의 영역이 아니라 [[중국 주석|국가주석]]인 시진핑의 담당이라 딱히 확답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확답을 주지는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일부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을 대신하여 타국 정상인사와 자리를 갖는 인물이었다.[* 중국은 G20이나 APEC을 비롯한 전세계적 차원 행사에는 국가주석이 참석하지만, 그보다 급이 낮은 지역 차원의 회담(예: 한중일 정상회담,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는 국무원 총리가 참석한다.] 행정부 내각(국무원) 수장으로서 [[인도 총리|인도의 총리]]처럼 타국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적에는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시진핑]] 주석이 중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현재[* 사실상 [[국가원수]]는 물론 [[정부수반]]도 시진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외교]] 격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