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쭝런 (문단 편집) === 중공 합류와 말년 ===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던 중 [[저우언라이]]의 초청을 받고 [[1965년]] 7월 20일, 비행기를 타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여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와 베이징 시장 펑전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마오쩌둥]]과 회견하였으며 [[류사오치]], [[주더]], [[덩샤오핑]], [[허샹닝]], [[쑹칭링]] 등 당정의 중요 인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혁명열사릉을 참배하고 [[중국공산당]]의 업적을 칭송하며 대만 문제에 [[미국]]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여는 등 [[국공내전]] 이후 중화민국에 합류하지 않고 외국을 전전하던 국민당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었다.[* 국공내전 이후 리쭝런을 제외하고도 장파쿠이, 쉬충즈를 비롯해서 중공 측에도 대만 측에도 합류하지 않던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다.] [[1966년]], 같이 귀국하였던 부인 궈더제(郭德洁)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공산당의 주선으로 27세의 간호사 후여우쑹(胡友松)과 재혼하였으며 이후 [[베이다이허]]에서 신혼을 즐겼는데 부부관계는 이때 괜찮은 편이었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후에 박해를 받았지만 1966년 국경절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는 등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1968년에 암 진단을 받았고 1969년 1월 30일, [[베이징]]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에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에게 자신을 돌봐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마오쩌둥의 업적에 대해서 아부하는 글을 바쳤다. 2월 1일에 장의식이 거행되었으며, 그의 사망 소식은 1969년 [[2월 2일]]자 [[인민일보]]에 게재되었다. 이후 시신은 [[팔보산 혁명공묘]]에 매장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장례식에 참여하여 타이얼좡의 승리와 중국으로 귀환한 두개의 큰 업적이 있다고 추도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측에서는 리쭝런이 가치가 떨어진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비난했다. 남은 아내 후여우쑹은 베이징에서 추방되어 하방되었다가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에 복권되어 국가 제1역사 당안관에서 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