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쭝런 (문단 편집) === [[반장전쟁]] === 1929년 1월 1일 [[편견회의]]가 시작되자 편견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월 5일 1차 대회에서 경리 심사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1월 22일의 5차 대회에서 편견위원회 상무위원 겸 편견위원회 조직부 주임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월 25일 6차 대회에서 육군군관학교가 위원제로 개편되자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지선, 허잉친, 우징헝, 다이지타오와 함께 교무위원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편견회의가 종결되고 난 이후 편견실시를 위한 상무회의는 2월 8일에 열린 2차 회의까지만 참석하고 2월 21일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가면서 호남성 주석 [[루디핑]]을 무단 해임하고 [[허젠]]을 신임 호남성 정부주석으로 임명하는 [[호남 사건]]을 일으켜 반기를 들었다. 장제스가 유화책을 제시하면서 리쭝런은 초기에 정치분회의 폐지를 포함한 중앙의 조치에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으나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중앙의 위신을 위해 잘못을 시인하고 탄옌카이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자신의 조치엔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맞섰다. 장제스는 리쭝런에게 난징으로 돌아와 사태를 해결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리쭝런의 조사를 면제해주었으나 결국 3월 26일 바이충시, 리지선 등과 함께 리쭝런에 대한 면직, 조사 처분 및 광서파에 대한 토벌령이 내려져 [[1차 장계전쟁]]이 일어났다. 리쭝런은 패배하여 호남을 잃고 5월에 광서까지 밀렸다. 리쭝런은 바이충시, 황샤오훙과 함께 호당구국군을 선포, 결국 중앙군에 대패하여 [[영국령 홍콩]]으로 달아났고 3전대회는 리쭝런과 바이충시의 당적을 박탈했다. 리쭝런의 잔여세력은 [[장파쿠이]]와 합세해 [[2차 장계전쟁]]을 일으켰다가 [[허잉친]]에게 진압당했다. 하지만 리쭝런은 포기하지 않고 1930년 2월 21일 황샤오훙, 바이충시, [[장파쿠이]], 호종탁 등과 연명으로 장제스의 하야와 옌시산의 전국 육해공 총사령 취임을 요구하면서 [[중원대전]]에 참여했다. 1930년 3월 15일 리쭝런은 펑위샹과 함께 육해공 부사령관에 추대, 3월 21일에 취임했다. 리쭝런은 바이충시, 장파쿠이의 병력을 규합하여 광서성에서 봉기, 호남으로 진군하여 형양, 장사, 악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우한을 위협했으나 호남성 정부주석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이 훈련총감 겸 우한 행영주임 [[허잉친]]이 8로군과 4로군을 지휘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1930년 9월 15일 베이핑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옌시산]], [[펑위샹]], [[왕징웨이]], [[탕사오이]], [[장쉐량]], [[셰츠]] 등 7인과 함께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북방의 옌시산, 펑위샹의 군세 역시 장쉐량이 중앙옹호를 통전하고 관내로 진출하면서 토벌당했고 11월 베이핑 국민정부가 취소되고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 하야 후 도주하면서 반장전쟁은 반장파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후 난징 국민정부로부터 바이충시와 함께 영구 제명을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