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쭝런 (문단 편집) === [[국민혁명]] === ||[[파일:이장백.jpg]]|| || 북벌 도중 리쭝런, 장제스, 바이충시 || 1926년 7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대권을 차지한 [[장제스]]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자 7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4군 군장 [[리지선]]과 함께 8군 군장 겸 전적총지휘 탕성즈를 원조하여 호남으로 진격했다. 우한 삼진이 함락된 이후에 강서성으로 진격했으나 군비 문제로 장제스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고[* 리쭝런은 이때 중앙에서 한푼의 군비도 주지 않아 모든 군비를 광서성의 수입으로 충당했다고 회고록에서 불평하고 있다.] [[1927년]] [[1월 1일]]에 개최된 [[난창 군무선후회의]]에서 장제스와 군비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절강성 진공이 시작된 이후 장제스가 직접 지휘하는 중로군 산하 강좌군의 총지휘를 맡아 상하이로 진격했다. 상하이 함락 이후 [[우한 국민정부]]로부터 안휘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어 국민당 좌파의 회유를 받았다. 3월 말 장제스가 청당을 위해 거사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타진하자 처음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4군 군장 리지선이 장제스를 적극 지지하였고 결국 장제스의 지시로 7군 주력부대를 이용하여 난징의 2군과 6군을 난징에서 축출하고 난징의 공산당원들을 체포, 수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4.12 상하이 쿠데타]]에 참여,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했다. 이후 탕성즈 등이 난징을 공격하려 하자 서정토공을 외치며 이들과 대치했으나 양 국민정부가 모두 북벌에 나서면서 일단 북양군벌들을 상대하게 되었고 [[국공결렬]] 이후 [[후한민]], [[장제스]] 등과 함께 [[우한 국민정부]]에 2기 4중전회를 개최하여 평화적으로 분열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1927년 8월, [[쑨촨팡]]과 [[탕성즈]], [[장파쿠이]] 등의 공격을 동시에 받은 장제스가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의 우한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답은 하야 밖에 없다고 장제스를 압박하여 하야하게 한후 우한 측과 [[영한합작]]을 논했다. 쑨촨팡이 난징 점령을 시도하자 [[허잉친]]과 함께 [[4월 30일]], 이들을 크게 격퇴하였고 8월의 용담전역에서 승리하여 영향력이 크게 성장함으로 난징 국민정부의 실세가 되었다. [[9월 15일]]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설립되자 [[탄옌카이]], [[쑨커]], 장췬, [[셰츠]] 등과 함께 이를 주도하고 국민당의 통합을 꾀했으나 이 과정에서 우한 정치분회를 중심으로 난징 합류를 거부하던 탕성즈가 무단으로 안휘성을 점령하고 휘하의 [[허젠]]을 안휘성 주석으로 삼자 긴급회의 끝에 토벌을 결정, [[1927년]] 10월 [[당계전쟁]]을 일으켜 탕성즈를 몰아내고 호남과 호북을 장악하여 우한 정치분회 주석, 제4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제스와 군비 문제라거나 여러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1927년 11월, 장제스가 일본 외유를 떠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하자 일본의 힘을 빌려 자신들을 토벌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길 정도였고 장제스가 복귀하는 과정에서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에 연루된 광동파를 감싸는 모습에 크게 불만을 품었으나 이미 장제스의 복귀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서산회의파]]와 결렬하고 다시 장제스를 지지하여 장제스의 우위를 인정했다. 1928년 4월,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선포되자 다시 북벌에 참여했다. 베이징 함락 이후 사실상 북벌이 완성되자 [[1928년]] [[6월 27일]], 우한에서 베이핑으로 북상 중이던 장제스와 회담하여 재병에 관해 논의했고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재병론을 내세우자 표면적으로는 찬성했으나 속으로는 불만을 품었다. [[7월 6일]], 장제스의 주재로 [[펑위샹]], [[옌시산]] 등과 함께 베이핑에서 [[탕산회의]]를 개최, 편견회의에 대해 합의했고 [[1928년]] [[8월 1일]], 난징에서 열릴 예정인 오중전회 참석을 위해 난징에 도착하여 오중전회에 출석했다. 여기서 정치분회 해체가 논제로 오르자 노골적으로 반대하였으나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상하이로 떠나 [[우징헝]], 장런제 등과 회동했다. [[1928년]] [[9월 18일]]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가 개최되자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리스쩡]], [[다이지타오]], [[쑹쯔원]]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중화민국국민정부조직법, 중화민국당훈정요강 등을 의결통과시켰다. [[1928년]] [[10월 8일]] [[중국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가 발표한 국민정부 조직법에 따라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 [[10월 18일]]에 군사참의원 주석에 임명되었다.[* 이때 펑위샹이 행정원 부원장 겸 군정부장에 임명되었는데 리쭝런이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리쭝런이 기자회견을 열어 해명하는 등 집단군 영수들 사이의 불화의 조짐을 드러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