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지선 (문단 편집) === [[국민혁명]] === ||[[파일:국민혁명군이제침.jpg]]|| || 국민혁명 시기의 리지선 ||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황포군관학교]]가 설립을 준비하는 황포군관학교 준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학교 건립 후 교련부 주임을 맡아 생도들을 가르쳤다. 1925년 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이 수립되자 국민혁명군 4군 군장이 되어 기존의 월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장제스와 함께 월군 총사령관 겸 군정부장 [[쉬충즈]]가 군비 배분을 불평등하게 한다는 이유로 그를 타도하여 상하이로 축출했다. 1925년 [[국민당의 2차 동정]]에 2종대 사령관으로 참여하여 [[천중밍]]을 토벌하였으며 [[주페이더]]를 빌어내고 국민당의 남정 총사령관에 임명, 등본은을 토벌하고 하이난섬을 점령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오르려는 [[장제스]]와 신경전을 벌였으나 1926년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자 왕징웨이의 군대 출동 요구를 불가능하다고 거부하면서 사태를 방조하였고 군인부가 설치되면서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에 임명, 휘하의 4군을 거느려 호남 전선에서 싸웠는데 큰 전공을 세워 4군 전체가 철군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1926년 12월, 수도가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겨지자 광동성 정부주석 겸 군사청장에 임명되어 광동성의 수비를 맡았다. 1927년 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군사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장제스의 반공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가뜩이나 군비 문제로 중앙과 마찰을 빚던 리지선은 [[4.15 광저우 쿠데타]]를 일으켜 광동성을 장악하고 광동에서의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 세력을 일소시킨다. 7월에 장제스가 [[쑨촨팡]]의 공격에 패배하여 하야하자 사태를 지켜보다가 9월에 성명을 발표하여 [[장왕합작]]을 주장하는 등 장제스를 지지했다. 1927년 10월, 정통성이 부정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우한에 잠적해버린 왕징웨이에게 난징에서 4중전회를 여는 것에 동의해달라고 설득하였고 왕징웨이의 후원자인 [[탕성즈]]의 행패가 심해지자 [[당계전쟁]]에 참여, 탕성즈를 토벌하였다. 이후 새로운 중앙당부를 설립하는 일을 논하기 위해 왕징웨이를 광저우에 초청했다. 1927년 11월 16일, [[장제스]]가 [[왕징웨이]]와 합작을 시도하자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해체를 위해 왕징웨이와 함께 난징으로 떠났다. 이틈을 타서 왕징웨이의 측근 [[천궁보]]가 [[장파쿠이]]와 황기상을 선동하여 11월 17일, [[장황사변]]을 일으켜 리지선의 부대를 축출하고 광저우를 점령했다. 경악한 리지선은 장황사변에 연계된 위원들의 자격 정지를 요구하는 한편 즉각 병력을 이끌고 광저우로 돌아왔는데 12월에 [[광저우 폭동]]이 일어나는 등 광동은 개판이 되었다. 리지선은 일단 장파쿠이와 함께 공산당을 진압하고 광저우를 되찾았으나 장제스가 장황사변의 주모자들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리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장제스와 틀어지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