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영희 (문단 편집) ==== 과오에 대한 인정? ==== 그는 이후 90년대가 되어서 이것과 관련된 질문을 다시 받았을 때 문화대혁명기간 중 [[홍위병]]에 의한 '''구습 타파'''이후 '''[[숙청|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문화대혁명 당시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덕분에 그 실상이 바깥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엔 [[크렘린]]이나 [[천안문]]에서 '''지난 번에 봤던 그 특정인이 보이지 않으면 숙청'''되었다고 추측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표면적으로 비슷한 성격이긴 한 '''[[68혁명]]'''이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며, 68혁명의 당사자들 역시 문화대혁명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여기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유럽의 좌파중에도 문화대혁명이나 심지어 [[캄보디아]]의 [[폴 포트]]를 관료적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이고 높게 평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놈 촘스키]]도 그랬다.] [[문재인]]은 자신의 책 《운명》에서 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리영희에게 물어보았고, 리영희는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였다. 그는 그 당시에 중국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하였다고 첨언하였다. 그의 책 대담집인 《리영희의 대화》(약칭 '대화')에서도 과거 문화대혁명 오판에 대한 자기고백을 했다. 리영희는 동구권 붕괴와 문혁에 대한 실상이 알려진 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90년대 여러 지식인들과의 대화에서 홍위병들이 야만적인 행위를 많이 했다고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는 한편, 문화대혁명을 히틀러의 아리아인 주장에 비견하고, 굶어죽어가는 중국 인민들의 사정을 무시하고 정신론만 강조한 자신의 과거 주장은 몽상병에 가까웠다고 아주 강하게 자아비판하며 물질과 정신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그러나 세계를 여행했던 지식인이 문화대혁명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반박도 있으며, 그의 문혁과 마오쩌둥에 대한 인식은 아직까지도 그의 개인사에 대한 가장 큰 논쟁거리들 중 하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