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승엽 (문단 편집) == 생애 == [[경기도]] [[남양군]] [[영흥면]] 선재리[* 現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리]에서 아버지 이기선과 어머니 전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기선은 [[뱃사공]]이었으나 이후 [[인천광역시|인천부]]로 이주하여 [[여관]]을 경영하였다. 1920~1930년대 [[일본 제국]]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에 따르면, 부친의 [[부동산]]과 [[동산]]이 약 2만원 (현재 물가는 약 4억원 추정) 상당에 이를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어린 시절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북한]]에서는 소[[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하면서 '출신부터 반혁명적인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사들 중 부르주아 출신들이 꽤 된다. 당장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아버지가 교육장학사 출신이였고, [[이현상]]도 아버지가 부농에 면장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다.] [[인천고등학교|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등에는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 당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그와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가 '졸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지만, 입학한 당해[* 기록마다 연도가 다르다. [[1921년]] 혹은 [[1922년]]에 입학했다고 한다.] 7월에 알 수 없는 사유로 퇴학조치되었다. 이후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보성전문학교 법률학 전문과]]에 들어가지만 [[1923년]] 2월 중퇴한다. 이 무렵에 그는 [[사회주의]]에 심취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다. 중퇴 이후에는 [[인천]]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간난'이라는 여인과 결혼도 하여 가정도 꾸렸으며, [[동인천역]] 맞은 편에 있던 인천미곡상조합의 사무장으로 일했다. 리승엽이 인천미곡상조합에서 일할 때 도보로 2 ~ 3분 거리에 [[조봉암]]이 운영하던 비강조합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모아 연료로 공급하는 곳)이 있었고, [[인천]]의 [[사회주의]] 운동 핵심에 있었던 박남칠이 그 옆에서 쌀 가게를 하고 있었다. [[https://m.blog.daum.net/hsykms/885|당시 가게들의 현위치]] 그러한 이유로 [[리강국]] 등 [[서울]]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자주 오가기도 했다. 훗날 이러한 인연이 시작되어 [[광복절]] 이후 [[인천]]의 미곡상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 지부의 핵심 인원이 된다. [[1925년]]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일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인천]] 지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에 관여한다. 이로 인해서 그런지 그는 [[1926년]] [[조선일보사]]에서 [[권고사직]]당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2년의 수감생활 이후 그는 계속해서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으로 '전조선 피압박 피착취계급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뿌린 '격문사건' 주도자로 수배당했지만, 그는 도주에 성공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당시 격문사건 재판부에서는 격문사건으로 체포된 6명에 대해서만 형을 집행하였고, 리승엽을 포함하여 체포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이후 그는 영남 지역에서 노동 생활을 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932년 이른바 '반제격문사건(반제사건)'으로 체포된다. 이는 [[만주사변]]과 관련하여 반제국주의 반전 격문을 뿌린 사건으로, 대범하게도 당시 [[진주시|진주]]와 [[부산광역시|부산]]에 있던 [[일본군]] 주둔지에도 이 격문을 뿌렸다고 한다. 이러한 혐의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인천]]에서 [[부산]]까지 와서 공판을 참관했다면서, 처자식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석방된 후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1940년]]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다. 이후 그의 평가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석방된 이후에 과거 [[농협|미곡상조합]]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인지 일제의 식량배급조합 이사로 있었고, 친일적인 글도 다수 썼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위장된 것이며 비밀리에 [[사회주의]] 운동[* [[함경도]]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 지하 조직에 관여했다고 한다.]을 벌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는 1945년 봄 [[조선건국동맹]] 결성에 관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이 되고 조선공산당 결성에 가담하여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오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무렵 [[박헌영]]의 지시에 의해 월북했으며, [[북한]] 정권 수립 후에는 사법상에 임명되는 등 요직에 앉았다. 박병엽 회고 등을 보면 박헌영과 리승엽 둘이 남로당의 역량을 과대평가해 과격투쟁의 지령을 내렸다는데 박병엽의 회고는 친북로당적이고 남로당에 지나치게 부정적이라 다 믿기는 어렵다. 그런데 남로당원과 두루 친했던 박갑동도 리승엽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니 리승엽은 인품이 나빴던 것 같다. 리승엽에 대한 몇 안 되는 긍정적인 묘사를 보고 싶으면 [[안재성(작가)]]와 [[김성동(소설가)]]의 저서를 보면 된다. 이 둘은 박헌영편이라 박헌영 최측근 리승엽을 긍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리승엽은 [[박갑동]]을 죽이려 한 적이 있으며, 정적에 대한 살인 혐의가 있는 인물이니 주의. [[1949년]]에는 [[박헌영]]과 함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조선인민유격대]](이른바 [[빨치산]])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12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사법상에서 해임되고 리용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2년 5월 8일, 국가검열성이 폐지되고 새로 인민검열위원회가 조직됨에 따라 초대 인민검열위원장에 임명된 것이 마지막 공직이었다. 그리고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정권 전복'과 '미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파일:인공치하 리승엽.jpg]] 인공치하 서울에서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연설 중인 리승엽. 물론 실제로 간첩 행위를 했다기보다는, 사실상 [[김일성]]의 정적 제거에 가깝다. 당장 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특별시장]]에 격하는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일하게 UN군 및 국군과 대치했으며, 김일성과 장교들이 평양을 버리고 도망갈 때도 끝까지 전선을 지켰다고 한다. 고향이 인천이라서 인천 지리에 밝았고 이로 인해 UN군과 국군을 상대로 인천에서 2주일이나 개길 수 있었다. 결국 2주일만에 숫적열세로 털리고 후퇴했으며 리승엽이 후퇴하자 서울은 수복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전쟁을 일으켰지만 무력 통일은 고사하고 북한 전역이 폐허가 된 채로 정전협정이 체결됐기 때문에, 김일성 입장에는 이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서 리승엽을 시작으로 남로당 인사들은 '정권 정복 음모 및 미제 간첩'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55년경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처형되면서 북한에서 남로당계 세력은 사실상 소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