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리싼 (문단 편집) === [[리리싼 노선]] === 이후 한동안 중국 공산당은 역량을 회복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폭동과 파업을 섣불리 선동하는 일을 자제했으나 1928년 [[이오시프 스탈린]]과 [[니콜라이 부하린]]의 노선 투쟁이 격화되고 1929년 경제[[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 우경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우경 착오와 동요를 비판하고 예방하라고 지시했다. 1929년 5월 15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제37호 통고>를 통해 우경에 대한 투쟁을 지시했다. 같은해 [[중동로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요구에 따라 [[소련]]을 옹호하면서 공산당을 좌경화로 몰고 갔다. 1930년 2월 17일 [[중공중앙]]은 <제70호 통고>를 통해 "군벌간의 전쟁은 곧 중국 내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충돌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 (...) 세계대전은 바야흐로 피할 수 없으며 반드시 곧바로 도래할 것. (...) 날로 성장하고 있는 노동자 투쟁이 정치적 직접혁명의 형세를 이끌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농민폭동, 유격전쟁, 도시파업, 병사들의 반항, 홍군의 확대를 외쳤다. 이에 따라 당은 무산계급의 영도력을 강화하여 총혁명 투쟁을 전개, 한개 혹은 여러개 성에서 우선적인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정치파업의 조직', '지방폭동의 조직', '군사반란의 조직', '홍군의 집중 공격'이라는 혁명 4대 구호가 등장하여 중심 전략으로 채택되었다. 4월 3일에 <통지 제130호가 발표, 홍군의 지휘계통을 중앙군사위원회에 통일시켜 홍군과 유격대를 중앙에서 통제할 것을 밝혔고 분산적 유격전술을 도피주의로 비난했다. 리리싼은 4월 5일과 4월 12일 <홍기>에 혁명고조와 무장투쟁의 실현을 촉구하는 글을 실으며 우선적인 승리필요성과 세계혁명과 중국혁명의 관계를 설명하며 무장폭동을 독려했다. 1930년 5월 제1차 전국소비에트구역대회가 개최되어 노동자, 농민의 역량을 결합하고 홍군과의 협조를 통한 도시 진공과 전국 소비에트 혁명 승리를 도모하게 되었다. 대회는 중국에 유산계급의 국민당과 무산계급의 공산당만이 있으며 최후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선언했다. 6월의 정치국 회의에서 리리싼은 <새로운 혁명의 고조와 한개의 성, 또는 수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라는 테제를 통과시켰고 코민테른은 이러한 리리싼 노선에 절대적으로 찬동했다. 이때는 [[반장전쟁]]이 한창이던 시절로 리리싼 입장에서 여러모로 폭동을 주장하기에 좋은 시기로 보였다. 하지만 리리싼은 극좌맹동주의, 좌경모험주의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너무 섣부른 봉기는 반대했다. 1930년 5월 16일 항저우 시위원회가 보름 안에 항저우를 포위 공격하자고 제안하자 리리싼은 이를 반대했고 좌경 경향은 아주 주의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930년 6월 9일 무장폭동이 필요하지만 중국이 이미 혁명고조에 이르렀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는 반박했다. 중국에 전국적인 정치적 파업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이를 말미암아 리리싼이 단순한 극좌 모험주의자만은 아니라 일부 현실적인 안목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 원동국은 6차 2중 전체회의에 즈음하여 리리싼의 정책을 우경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의 폭동이 필요하다는 전략 자체는 변치 않아서 7월 13일 난징, 우한, 상하이, 항저우의 폭동을 준비하고 7월 16일 코민테른주석단에 군벌전쟁을 혁명전쟁으로 전환시켜야 하며 폭동과 총동맹파업의 실현의 승인을 요청했다.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 좌익소아병적 현상이 나타났다면서 중국 공산당의 낙관론적 관점을 비판했지만 폭동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혁명고조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따라 [[펑더화이]], [[마오쩌둥]] 등 홍군의 일선 지휘관들이 7월 폭동을 일으켰고 7월 27일 펑더화이의 홍3군단이 [[창사 폭동|장사를 점령]]했다. 중공중앙과 리리싼은 크게 고무되어 총동맹파업을 일으키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국민당의 반격으로 이미 점령한 장사에서 축출되었으며 난창, 우한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기대했던 노동자와 농민의 호응도 없었다. 8월 중순 코민테른 원동국은 국민당-제국주의 세력의 역량과 중국 공산당의 역량 차이가 현저하여 폭동을 진행할 수 없다고 보고하게 되었다. 결국 리리싼은 폭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코민테른은 정식으로 무모한 폭동노선을 취소할 것을 지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