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덩후이 (문단 편집) === 정계 입문 === [[파일:ClPBHZb.jpg]] (1980년대 부총통 시절의 모습. 왼쪽은 [[장징궈]] 당시 총통) [[국립타이완대학]] 교수 재직 중 1971년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행정원장]] [[장징궈]]의 눈에 들어 정무위원에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여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타이베이시장]]을 맡았고, 1981년에 [[타이완성]] 주석에 올라서 3년간 재직하다가, 1984년 부총통 셰둥민이 장징궈의 와병을 틈타 음모를 꾸몄다가 적발되어 쫓겨나면서 그 후임으로 발탁되어 권력의 정점을 넘보게 된다. 이때 장징궈는 총통의 신분으로 리덩후이가 집무를 보던 주석 관저를 찾아가 직접 축하하는 등 이례적일 정도로 리덩후이를 밀어주었다. 1982년 아들 리셴원(이헌문)을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장징궈가 이 때문에 아들이 없는 리덩후이가 권력욕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가 권력 2인자인 부총통으로 지명되었을 당시[* 전임 부총통인 셰둥민도 본성인이지만 대륙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반산(半山)이었다. 순수 대만 본성인으로서는 리덩후이가 최초.], 집권 국민당을 위시한 대만 정계는 이를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였다. 장징궈는 마땅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이미 이 당시에 장징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부총통 자리는 일반적인 [[부통령]] 같은 [[병풍]]이 아니라 진짜 차기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아래와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출처 : 최창근,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리수 : 2014년), 148쪽.] > 와병 중이던 장징궈 총통에게 국민당의 측근들이 물었다. "총통 각하. 각하의 후계자는 누가 좋겠습니까?" 장징궈가 고향 저장성 사투리로 대답했다. "니 덩 후이얼"(你等會兒. [[기다려, 당황하지 마라! 이건 공명의 함정이다!|기다려라(= 아직 결정할 때가 아니다)]]). 그러자 이를 잘못 알아들은 측근들의 반응. "니 덩 후이얼? 아, 후계자는 리덩후이라는 말씀이시군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