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덩후이 (문단 편집) == 평가 == 총통 재임기에는 [[대만의 민주화 운동|대만의 민주화]] 이행을 주도했고, 국제 사회에서 대만의 독자성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하는 등 현대 대만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해낸 지도자다. 경제적으로도 1990년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는 등의 곡절이 있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대만의 고도성장 기조가 리덩후이 때까지 굳건하여 1992년에 한국보다 먼저 1인당 GDP 1만 달러를 달성했고 재임 후반기엔 IMF 외환위기를 제법 무사히 넘기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대만의 경제성장이 절정에 달하여 임금상승률도 높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내수시장도 나름대로 잘돌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2001년에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나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임금이 사실상 동결되었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1인당 GDP에서 한국한테 역전당하게 된다.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당시 대만 언론에선 IMF 이후 경제 구조적으로 문어발식 기업 경영 자제, 전문화, 벤처 붐 등 새롭게 탄생한 한국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현재도 대만 임금수준은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한편으로 반도체와 IT 등 첨단 사업에 대한 육성을 적극적으로 시작하여 현재의 대만 경제 근간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대만 내에서는 리덩후이 재임기를 좋았던 시절로 추억하기는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에 추진되었던 적극적인 대만 독립 정책과 총통 퇴임 후 행적 때문에 그가 소속했던 [[중국국민당]]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오히려 평가가 좋지 못하고 [[범록연맹]] 쪽에서의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 다만 신조류로 대표되는 범록 운동권 측에서는 열등감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만 민주화에서 리덩후이의 역할은 절대적인 수준이기 때문.[* 범록 진영이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이유기도 하다.] [[민주화]] 항목에도 나오는 것처럼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2020년대 현재 민진당의 파벌은 크게 두 개로 갈라지는데, 리덩후이의 후계자로 육성된 [[차이잉원]] 현 총통 세력과 [[라이칭더]]로 대표되는 신조류파가 그것이다. 범람 쪽에서도 평가 자체는 [[애증]]에 가까운 게 리덩후이가 타이완성 성장, 부총통을 비롯한 각종 요직을 거쳤고, [[마잉주]] 전 총통을 비롯해 [[롄잔]], [[쑹추위]] 등 범람의 주요 거물들이 리덩후이에 의해 발굴, 육성된 인물들이라서 대놓고 리덩후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주리룬]]은 리덩후이가 퇴임하고 대만 독립파로 전향한 뒤로도 그를 멘토로 섬겼고, 리덩후이가 사망했을 땐 [[마잉주]] 전 총통을 비롯해 [[중국국민당]] 주요 인사들이 대거 애도 행렬에 동참했다. 그의 대(對)대륙 정책은 영향력이 커서 후임 총통인 [[천수이볜]]과 [[마잉주]] 모두 리덩후이가 내세운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차이잉원]]은 아예 리덩후이가 직접 자문위원으로 임명했던 인물이라 어떤 면에선 그의 수제자 격이기도 하다. 대만 독립을 추구했기에 [[중국 대륙]]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좋지 않다. 거기에다 친일 성향까지 겹친지라 대륙에서는 [[한간]]으로 분류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 애초에 인지도가 적긴 하지만, 안다 하더라도 친일 성향 때문에 찝찝하다는 인식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도 대만 민주화나 독립 노선 등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선 학계 차원에선 평가하기도 하는 편. --혼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