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다자오 (문단 편집) === 사망 === >'''"공산주의는 세계에서, 중국에서 기필코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해 나가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 >리다자오의 최후 진술.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진행되던 [[1927년]] 4월, 국민당 우파의 거두인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거행하여 [[중국공산당]]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 북방을 지배하던 [[장쭤린]]도 [[1927년]] [[4월 6일]], 베이징 경찰총감 진흥아, 헌병사령관 왕기의 인솔 하에 3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베이징의 소련 대사관과 병영을 습격하여 16명의 소련 외교관과 대사관에 은거하던 리다자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원 35명을 체포하였다. [[4월 19일]] 소련 대사 치얼니크가 항의의 의미로 귀국하였다. 리다자오가 체포되었다는 말에 지식인 사회는 구명을 요구했고 노동자 조직은 리다자오 구출을 도모하기도 했으나 리다자오는 혁명역량을 소모시키지 말라고 거부했다고 한다. 장쭤린은 휘하의 양위팅을 보내 리다자오에게 전향할 것을 요구했으나 리다자오는 거부했다. [[장쭝창]] 등은 공산주의자를 빨리 죽여 없애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장쭤린에게 주장했고[*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반대로 장제스가 비밀리에 장쭤린에게 리다자오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한다.] 장쭤린은 사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린 죄목으로 리다자오를 '중국공산당 북방수령'으로 칭하고 [[총살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허펑린]]이 주재한 군사법정은 리다자오에 대해 총살형을 언도했다. 리다자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평소 [[역사학]]을 연구해서 일생동안 수집해온 동서양의 서적이 아주 많다. 만일 이미 몰수했다면 아직은 보존시켜 문화에 이롭게 하기를 바란다."[* 약 40년 후에 그의 제자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여파를 보면 아이러니하다.] [[4월 28일]] 리다자오는 등문휘, 장읍란 등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십자가에 묶인채 '''공산주의 만세'''를 세번 외치고 총살당했다. 그를 스승으로 여기던 [[마오쩌둥]]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그가 총살당한지 불과 수개월 후 [[우한 국민정부]]도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지 4년 후에 거행되었다. [[1932년]], 리다자오의 유가족들이 극심한 빈곤으로 리다자오가 남긴 장서를 팔려고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후스]]와 [[루쉰]]의 동생 주작인이 생활비를 대주었다. 리다자오의 아내는 [[1933년]] 죽었으나 자식들은 중공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완전히 점령한 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이후 모두 출세했고, [[문화대혁명]] 때도 이렇다 할 박해는 당하지 않았다. 이후 리다자오는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공산당 창건인, 사회주의 첫 순교자로 추앙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