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다자오 (문단 편집) === 일본 유학 === [[1914년]] 1월 진보당 지도자 양화룡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당시 [[유럽]] 유학에는 매달 500원이 들어갔는데 [[일본]] 유학은 매달 30원만 들어가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했다.]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해 9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본과에 입학하여 2년간 유학했다. 와세다대학 청국 유학생 장정은 대학부로 진학하기 위해 [[영어]]와 [[일본어]] 실력을 요구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했다. 리다자오는 일본어는 보충학습이 필요없을 정도로 능통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영어실력은 부족한지라 YMCA 중국인 유학생 기숙사에서 살며 [[미국인]] 아더 로빈슨에게 영어를 배웠고 한학기 동안 준비한 끝에 1914년 9월 정식으로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 와세다대학은 [[도쿄제국대학]]과 달리 학풍이 자유스럽고 교단에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강습에 열심인지라 리다자오는 일본에서 불어오기 시작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받아 국가학원리, [[대일본제국 헌법|제국헌법]], 경제학원리, 근대정치사, 민법, 정치경제에 관한 고전연구, 영문학 등을 배웠으며 부전공으로 철학, 명치사, 제2외국어 등을 배웠다. 이 기간 동안 리다자오는 기존의 동양적 인본주의에서 서양적 민주주의로 사상의 기반을 교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5년]] 하반기에 중화혁명당과 접촉하는 등 정치활동에 매진하면서 그의 학습은 1년 정도에 그쳤고 [[1916년]] [[2월 2일]] 정식으로 자퇴하였다. 리다자오는 신주학회를 조직하고 위안스카이의 전제적 정권을 비판했다. >"마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고 사회가 망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고통은 없다. 한 사회의 인화가 사라지면 그 사회는 반드시 망하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단지 망국의 화가 지극함만을 두려워하고 그 사회가 이미 망했음을 알지 못한다. 단지 망국의 화가 강렬함만을 알고 망군의 화가 망국의 화보다 더욱 강렬함을 알지 못한다." 이 시기 리다자오는 중국 국민은 완전히 희망을 잃었고 권리를 누릴 능력이 없다고 보던 과거보다 민중, 군중에 집중하여 군중의지만이 역사적 인물의 세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14년 11월 리다자오는 위안스카이가 제정을 복고하려 하면서 [[중국인]]들에게 공화제나 대의정부가 부적당하다고 주장하자 중국인들에게 공화국을 운영할만한 정치적 의식과 능력이 있다고 반박했다. [[1915년]] 1월 [[일본 제국]]의 [[21개조 요구]] 이후, 적극적인 반대 운동에 나서며 <국민의 신담>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했고 1915년 6월 위안스카이 정부와 일본 제국주의를 동시에 비판했다. >"정부가 만일 망국의 정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하루빨리 그 복고의 죄와 백성을 무시한 죄를 깨닫고 속히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여 근본대계를 정하고 진정한 민의관계를 회복하며 국민교육을 보급하고 징병제도를 실행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군사를 훈련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원수와 치욕을 갚고자 도모해야 할 것이다." 1916년 5월 리다자오는 자신의 민중 중심 정치관을 집대성하여 집필한 후 중국으로 귀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