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다자오 (문단 편집) === 유년시절 === [[직예성]] [[탕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부터 지방의 명망있는 유학자들로부터 유교교육을 받으며 민본주의를 터득했으며 16세에 영평부 중학에 들어가 신식교육을 받으면서도 전통학문에 대한 공부도 병행했다. 18세에 [[톈진]]의 북양정법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서양의 정치사상을 배웠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기대를 걸었으나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실망했다. [[1912년]] 북양법정정문학교 내에 북양법정학회가 성립되자 학회 편집부장에 추대되어 월간학회지를 편찬했고 졸업하는 [[1913년]]까지 여러 정치평론을 게재했다. 이때 리다자오는 중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농민은 땅을 잃고 노동자는 직업을 잃고 상인은 원천을 잃었으며 부모와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져 시름겹기가 그지없다. 병화에다 수재와 화재같은 천재가 겹치고 그 위에 인화가 닥치니 안락한 거처가 없어 전전하다 굶어죽어서 시체와 해골이 구룽에 나뒹굴고 들판에 버려져 있다." 또한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지방군벌들의 전횡에 대해서도 통렬히 비판했다. >"민정이라는 것은 소수의 포악하고 교활한 자들의 전제정이지, 우리 국민 자주의 정치가 아니다. 민권이라는 것은 소수의 포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훔쳐간 권리이지 우리 국민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니다. 행복이란 것은 소수의 포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약탈한 행복이지, 우리 국민이 편안히 누리는 행복이 아니다." >"혁명 이전 우리 국민의 근심은 하나의 전제군주에 있었다. 혁명 이후 우리 국민의 근심은 수십의 전제도독에 있다. (...) 오늘날 한 전제도독의 세도는 이전 군부의 배에 달하고, 그 힘은 한 성에 입중되어 민이 받는 고통은 더욱 무겁다. 따라서 민권은 모두 이들 무리가 갈취하여 방자하게 구니, 우리 국민은 어쩌란 말인가?" 리다자오는 [[쑨원]]과 [[쑹자오런]]의 [[중국국민당]]도 만행을 저지르는 성급하고 망령된 폭도라고 깠고 민주당을 비롯한 온건파도 닭과 오리처럼 이익을 위해 다투는 자들로 폄하했다. 리다자오는 혁명 이후 중국의 혼란상을 기본적으로 중국의 민권이 쇠약하고 민력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고 민중 개개인의 덕이 부족하므로 사회의 군덕 또한 부조닥하다고 여겼다.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도 이런 연유로 여겼다. 이 때문에 리다자오는 권력을 중앙으로 집권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민교육을 통해 국민들의 민권 신장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