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근모 (문단 편집) == 생애 == 1926년 4월 5일 평안북도 정주의 노동자 집안에서 출생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소련으로 유학하여 1949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강신제강소 책임비서, 정밀기계공업총국 총국장을 지냈으며 중앙당으로 진출하여 1953년 조직지도부 과장, 1958년 5월 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64년 당 기계공업부장에 임명되는 등 중용되었다.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되자 집행부 성원에 선출되었으며 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4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11월, 당중앙위원회 문화예술부장을 거쳐 1968년 7월, 제2기계공업상 재임이 확인되었다.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1914)|김태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빠르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일부 연구에서 5차 당대회에서 리근모가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1971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제2기계공업상에서 해임, [[한성룡]]에게 물려주었으며, 이후 1971년 6월에 비서 임명이 확인되었다. 애초에 당비서로 조동되면서 내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다.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겸 평안남도 인민위원장으로 재임하다가 9월 9일, 평안남도 경축대회에서 보고를 맡았다. 이후 1973년 9월, 5기 7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9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77년 4월, 다시 평안남도 인민위원장 임명이 확인되었다. 1977년 12월 6기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78년 10월 평안남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7월 남포시 책임비서를 거쳐 10월의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1981년 3월 정무원 부총리 겸 채취공업부장에 임명되었고 1982년 2월 7기 대의원에 재선,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그해 4월에 [[최현(북한)|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1910)|김책]]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1월 남포시 인민위원장을 겸하게 되었으며 1986년 2월 5일부터 8일간 진행된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공진태]], [[홍성룡(북한)|홍성룡]], [[안승학]]이 정치국에서, [[연형묵]], [[안승학]], [[김중린]]이 비서국에서 해임되면서 [[김환(북한)|김환]], [[계응태]]와 함께 비서국 비서로 승진하였다.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을 지냈다.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재선 후 1986년 12월, 6기 12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으며 총리 조동을 위해 비서에서는 해임되었다. 그 직후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신임 정무원총리 및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오진우]]와 함께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안하였다. 1987년 8월, [[박영순(1905)|박영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그의 임기는 영 신통치 않아 1987년 11월, 13차 당대회 직후의 중국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쯤가면 중국은 개혁개방 없는 북한에게 경제적 지원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김일성은 1988년 12월 12일,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를 긴급소집하여 그의 해임을 제안하였고, 리근모는 자신의 악화된 건강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 직후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8기 4차 회의가 그의 해임과 신임총리 [[연형묵]]의 임명을 승인하면서 리근모는 총리직은 물론 정치국에서 퇴출되어 완전히 숙청당했다. 이때 남한에선 그가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보도가 나오기도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01180039218576|했다.]] [[고영환]]에 따르면 황해제철소 부지배인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쫓겨나기 직전인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해임 사유에 대해서는 1988년 12월에 보위부에서 일하던 그의 아들이 총살당했기 때문에 연대책임을 물었다는 말도 있고, [[강명도]]에 따르면 리근모가 남포시당 책임비서로 일하면서 북한의 홍콩을 만들겠다고 조성한 와우도를 김정일 특각 부지로 진상하지 않고 김일성 교시를 들먹이며 거절한 것 때문에 김정일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이 리근모를 총리로 임명하자 김정일은 리근모를 조지기 위해 자금을 꽉 쥐고 있는 대성은행이 정무원에 돈을 주지 않도록 지시했고, 결국 마비되어 가는 북한 산업을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다. 건국 이후 한번도 꺼진 적이 없는 김책제철소와 황해제철소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김일성이 리근모를 강력하게 질책했지만 감히 김정일 탓을 할 수 없었던 리근모는 묵묵히 욕을 받아먹고 쫓겨났다. 그나마 김정일 탓을 안한 덕인지 나중에 다시 기용되긴 했다. 4년간 두문불출하던 리근모는 1992년 12월 함경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복귀했고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에 잇달아 위촉되고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면서 김정일 시대에도 함경북도 책임비서로 계속 유임되었다. 다만 인민위원장 자리는 책임비서와 인민위원장이 분리되면서 [[박수길]]에게 물려주었다. 고령에도 나름 잘 나가는 것으로 보였으나 2001년 7월 해임되고 [[홍석형]]에게 자리를 내준 이후 공개석상에서 자리를 감추었고 현재까지 생사는 알려진 것이 없다. 구글에 검색하면 2001년에 죽었다고 뜨지만 2001년에 해임된 것을 죽었다고 오표기한 것에 불과하며, 현직 도당 책임비서가 임기 중에 사망했다면 [[최원익]]이나 [[리철봉]]의 경우처럼 즉시 부고가 떠야 정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