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비우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 === 르부프는 9월 12일 [[나치 독일|독일]] 제1산악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르부프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지대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지휘부는 폴란드군의 루마니아 철수를 위해 르부프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르부프는 일주일 넘게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9월 20일 르부프에 당도한 소련군이 독일군으로부터 자리를 넘겨받고 르부프를 공격했다. 결국 9월 21일 도시는 소련군에 항복했다. 커즌 선에 따라 폴란드 동부를 차지한 소련에 의해 르부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르부프를 점령하던 소련군은 도시 내 우크라이나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군의 르부프 점령을 환영했다. 하지만 소련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를 억압했고 1940년에만 약 3만 명의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들이 도시에서 쫓겨나 소련 내륙으로 이송되었다. ||[youtube(PFH1kOcaBOg)]|| || 르비우에서 독일군이 벌인 유대인 박해를 촬영한 영상. ||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르비우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처음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침공을 환영했다. 이들은 과거 오스트리아의 지배 시절을 떠올리며 독일 역시 마찬가지로 관용적인 정책을 베풀어 주고 폴란드와 소련의 통치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리라 믿었다. 6월 30일 도시가 독일에 함락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은 르비우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정부의 복원을 선언했는데, 이와 함께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로"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나치는 우크라이나인의 해방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9월에 [[스테판 반데라]], 야로슬라프 스테츠코 같은 OUN 고위인사들을 모두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지하로 들어간 OUN은 더욱 극단적으로 변해서 나치, 폴란드인, 소련 모두와 싸우기 시작했다. 폴란드인 지식인이 처형되고 무작위 일제검거가 일어나는 등 나치와 민족주의자의 세력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에게 가혹했다. 이는 소련의 통치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야만적인 '제노사이드', 즉 인종학살이었다. || [youtube(ppLbu3hcFPI)] || || 1941년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직후 르비우 근교의 촐로키우 시(Zolochiv)에서 벌어진 유대인 색출. 영상 속에서 주민들과 친위대원, 독일 국방군 병사들이 '웃으면서' 구경하는 가운데 이웃들이었던 우크라이나계 민병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유대인 남성은, 영상이 촬영된 다음 날 [[아인자츠그루펜|나치당 친위특무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위 영상이 찍힌 당시 르비우 일대에서는 친위대, 우크라이나인, 국방군이 5일간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이 이후, 우크라이나인 주민들이 독일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숨겨준 사례 또한 다수 확인되었다. || 하지만 이들도 유대인들만큼 고통스럽진 못했다. 르부프는 바르샤바, 우치에 이어 폴란드에서 세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로, 전쟁 직전 도시의 유대인 인구는 약 11만으로 불어났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뒤, 폴란드 서부의 많은 유대인들이 르부프로 탈출함에 따라 독일군 점령 직전 유대인 인구는 무려 22만에 달했다. 하지만 르부프마저 독일에 점령당하자 이들 유대인들에겐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르부프 주둔 SS사령관은 가장 악명높은 살인마 중 하나였던 SS 집단지도자[* Gruppenführer. 중장에 상응.] 프리츠 카츠만(Fritz Katzmann)이었다. 도시를 점령한 독일은 우선 NKVD가 정치범 수용소에서 학살을 벌일 때 유대인들이 협력했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선동했다. 물론 실제로는 소련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모두가 NKVD 학살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선동에 넘어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르부프의 폴란드인, 유대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그들의 피가 섞인 우크라이나인, 학살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인을 닥치는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총은 기본이요 몽둥이, 칼 등 현지인이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무기가 동원되어 학살이 행해졌다. 이와 함께 [[아인자츠그루펜]] 역시 도시의 유대인을 학살하여 한 달이 안되는 기간에 약 1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 역사는 이를 르부프 [[포그롬]](Lviv pogroms)이라 하는데, 폴란드 타 지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 달리 현지인들이 주가 되어 인종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11월 8일 르부프 교외 자마르스티니프(Замарстинів) 구역에 게토가 만들어졌고 약 12만 명의 유대인들이 게토에 수용되었다. 게토로 이동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페우테브나(Pełtewna)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 다리에 서 있던 SS들은 걸음걸이가 느린 노인, 장애인들을 그 자리에서 총살했고 약 5,000명의 유대인들이 이 다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다른 게토들과 마찬가지로 르부프 게토의 상황 역시 끔찍하기 짝이 없었으며 게토의 유대인들은 독일인 식량 배급의 10%만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첫 절멸수용소 이송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4개월의 기간동안 1만명이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르부프 게토는 절멸수용소 이송이 가장 빨랐던 게토 중 하나로 1942년 3월 15,000명의 유대인이 [[베우제츠 절멸수용소]](Belzec extermination camp)로 이송되었다. 그 뒤 8월 약 5만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베우제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3년 1월에는 프리츠 카츠만의 지시로 약 2만명의 유대인과 유대인 경찰 전부가 도시 근교에서 총살당했다. 1943년 6월 나치는 게토를 없애기로 했는데 남아있던 12,000명의 유대인들은 게토 속에 숨겨져있던 피신처로 숨고 일부는 발악적인 저항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은신처를 불로 태워 많은 유대인들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극히 일부만이 하수도를 통해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며, 르부프 게토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유대인은 '르부프 임시 유대인 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823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944년 6월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폴란드 이동의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폴란드 영내 진입이 눈앞에 다가오자 소련군보다 먼저 폴란드 주요 도시를 자력 탈환하고 폴란드 독립국가를 세울 목적으로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폭풍 작전'에 따라 폴란드 지하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 속칭 PPP)에 폴란드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르부프에서도 1944년 7월 21일 PPP의 주력인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속칭 AK)을 중심으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4일의 전투 끝에 국내군은 도시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르비우에서 나치와 민족주의자가 벌인 참극은 끝을 맺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