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비우 (문단 편집) === 전간기 (1918~1939) === 하지만 독립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던 폴란드인 역시 도시와 동부 갈리치아를 확보해 신생 폴란드에 붙으려 했고, 곧 우크라이나인들과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군 조직을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이 도시를 장악했고, 도시는 그대로 서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 충격에 빠진 폴란드인들은 서우크라이나 독립 당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십대의 농민 자식들로 구성된 1,400명의 우크라이나 주둔군은 이 봉기를 막을 수 없었고 폴란드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장악한 뒤 약 340명의 우크라이나인, 우크라이나인을 지지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곤 우크라이나인의 단체를 모두 폐쇄하고 체포하는 등 폭압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이런 와중 1919년 2월 14일 신생 폴란드군은 르비우의 폴란드인들을 원조하기 위해 서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서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보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주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도 1월 7일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략을 당했고 2월 5일에는 수도 [[키이우|키예프]]가 점령당해서 서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대 우크라이나의 무장세력 중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서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의 비(非)러시아 세력 중 군사력을 갖춘 독립세력은 크게 3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다른 하나는 [[네스토르 마흐노]]의 [[마흐노우슈치나]], 마지막 하나가 서우크라이나. 병력은 각 세력이 10만 가량으로 서로 엇비슷했지만 서우크라이나의 군대가 훈련도가 더 높고 규율도 있었다.] 근 9개월간 폴란드를 상대로 버티는 저력을 보여주지만 결국 동부 갈리치아와 르비우 전역이 점령당해 사실상 멸망했다.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7월 16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이었던 우크라이나는 대소전쟁에서 폴란드의 도움을 얻으려 했고, 이렇게 동부 갈리치아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 거래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1920년 4월 21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폴란드 공화국 정부와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Warsaw_(1920)|바르샤바 조약]]을 체결, 동부 갈리치아를 폴란드령으로 인정하고 그 댓가로 폴란드의 군사원조를 받았다.[* 해당 조약은 우크라이나에서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다. 폴란드와 직접 총칼을 맞댄 서우크라이나 대통령 예우헨 페트루셰비치(Євген Петрушевич)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했다. 다른 우크라이나인들도 소비에트 러시아만큼이나 폴란드를 미워했다.]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개입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흔한 국경분쟁에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의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싸우던 벨라루스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가난한 황무지였던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벨라루스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발도 진척되고 토지도 비옥하고 동부를 중심으로 공업화도 이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폴란드는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목표로 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결코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러시아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9년 [[적백내전]]에서 남러시아군을 이끌고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데니킨]]이 안장된 돈스코이 묘지를 참배하던 도중 '''"데니킨은 우리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오직 러시아의 권리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정도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이야 물론 다르지만.]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은 1920년 5월 키예프를 탈환했으나 곧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에 크게 밀려 서쪽으로 퇴각했고, 르비우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전공을 위해 탐내던 도시로 1920년 7월부터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세묜 부됸니]]가 지휘하는 소비에트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8월 중순 소비에트 러시아의 서부전선군이 [[바르샤바 전투(1920년)|바르샤바 전투]]에서 궤멸됨에 따라 르비우 공략에 들어가는 힘도 약해졌고, 르비우를 공략하던 [[소비에트 러시아]]군 역시 8월 말 [[폴란드군]]의 반격을 받아 격파되어 철수했다. 이후, [[리가 조약]]으로 전쟁이 폴란드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르부프는 동부 갈리치아와 함께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르부프 주의 주도가 되었다. 전간기 르부프는 수도 바르샤바에 이어 두번째로 중요한 경제 중심지였고[* 오스트리아의 지배기간 동안 르부프는 크라쿠프를 추월해 갈리치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타르기 프스호드니에(Targi Wschodnie, 동부 박람회)라는, 루마니아, 헝가리, 소련을 아우르는 주요 무역 박람회가 1921년부터 매년 르부프에서 열렸다. 1931년 경 도시의 인구는 31만에 달했고 그 중 63%가 폴란드인, 24%가 유대인이었으며 11%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우크라이나계 시민들을 차별했다. 우크라이나인 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시 의회에 우크라이나인은 없었다. 우크라이나인을 도발하려는 목적에서인지 시 의회는 1918~1920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폴란드인들을 기념해 행진 세레모니를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빈에서 1929년 세워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집단(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ї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 ОУН)은 르부프에도 영향을 미쳐 르부프의 폴란드인 경찰국장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것은 2차 대전기 도시에서 일어날 비극의 서막이었다. 정작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의 르부프는 굉장히 가난한 지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국 내부 개발에도 버거워할 정도로 내부 사정이 복잡한 나라였어서 갈리치아 개발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르부프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계선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더더욱 르부프를 방치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르부프는 폴란드 정부가 열심히 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루블린]]과 더불어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비스와 강을 경계로 이른바 '폴란드A'로 불리는 비스와 강 서쪽의 '부자 지역(대표적으로 [[그니에즈노]], [[카토비체]], [[바르샤바]], [[크라쿠프]], [[우치(폴란드)|우치]], [[포즈난]] 등)'과 '폴란드B'라고 불리는 비스와 강 동쪽의 '가난한 지역([[르비우|르부프]], [[루블린]], [[빌뉴스|빌노]], [[브레스트(벨라루스)|브제시치]], [[비아위스토크]] 등)'으로 나뉜 상태였는데 르부프는 '폴란드B'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래서 르부프 시는 당시 [[사회주의]] 토지개혁을 부르짖는 폴란드 농민당의 최대 표밭이었다. 폴란드 농민당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인에 대해서는 차별을 주장했다. 중도적반공주의자이자 연방주의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농민당과는 선을 그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르부프 내의 우크라이나인이나 독일인도 이끌고 가려고 했지만 정작 피우수트스키는 르부프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