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비우 (문단 편집) == 역사 == 르비우는 1256년 건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적루테니아(Червона Русь)와 [[갈리치아]]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원주민인 [[루테니아인]]은 1349년부터 1991년까지, 1918년 잠깐을 제외하고 나라 없이 지내야 했고 르비우도 [[폴란드 왕국|폴란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소련]]의 지배를 돌아가며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폴란드의 지배가 특히 길었고[* 1349~1772, 1920~1939.], 루테니아 왕국 시절부터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한 [[폴란드인]]이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상당부분 폴란드화 되었기 때문에 [[키이우]]를 비롯한 다른 우크라이나 도시들과는 다소 차별화된 외관을 가지고 있다. [[폴란드인]]들은 나라를 잃은 뒤에도 도시의 다수 인구를 차지하며 르비우를 폴란드의 문화 중심지로 가꾸어갔다. 하지만 동시기 [[유대인]]과 [[우크라이나인]]도 도시의 상당수를 점하고 있었기에 르비우는 이들의 문화중심지, 그리고 특히 우크라이나인 민족운동 본거지 역할도 겸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처음엔 그 방식이 극단적이진 않았기에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진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전반적으로 서로 큰 대립없이 공존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내셔널리즘]]이 전파되자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은 도시의 정체성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르비우의 근세사가 영광을 누리던 한 다민족 국가의 흥망과 함께한 역사였다면, 근대사는 상기한 바와 같이 나라 없는 두 민족의 공존과 대립의 역사였다. 이런 역사를 지나는 동안,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인에게는 갈망의 도시였고 전후 도시가 드디어 우크라이나인의 품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커지자 도시엔 우크라이나인들이 몰려들어 현재 도시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우크라이나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 그리고 현 우크라이나가 서부의 친서방, 동부의 친러로 대립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시의 다수가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르비우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가장 강한 도시 중 하나이다. 지배자들이 그들의 언어로 도시를 부름에 따라 도시의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따라서 이 장에선 르비우의 이름을 도시를 지배하는 세력이 바뀜에 따라 그들의 언어로 도시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기술하도록 하겠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부르는 이름인 르비우를 기본으로, 폴란드인은 이 도시를 르부프(Lwów)라 부르고 [[오스트리아인]]([[독일인]])은 렘베르크(Lemberg),[* 과거에 이 도시가 오스트리아의 도시였을 때는 [[독일어권]] 밖에서도 렘베르크라는 명칭이 많이 통용되었지만, 요즘은 독일어권에서도 렘베르크라 부르기보다는 그냥 우크라이나어를 음역해서 Lwiw(르비프)라 부른다.] [[러시아인]]은 리보프(Львов)라 부른다. [[라틴어]] 표기는 레오폴리스(Leopolis)이고,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자국어로 변형해서 레오폴리스(Leópolis), 레오폴리(Leopoli)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