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노 (문단 편집) === 나치의 프랑스 점령기 === 독일의 프랑스 점령 후 비양쿠르(현 불로뉴비양쿠르)[* [[파리(프랑스)|파리]]의 교외 지역 중 하나다.]에 있는[* 여기에는 현재도 르노 본사가 있다. 공장은 운영 중단 후 보존 중이다.] 르노 공장도 나치의 손에 넘어갔고, [[전범기업|독일군을 위한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됐다.]] 나치는 탱크의 생산을 요구했지만 당시 르노를 경영하던 루이 르노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고용 유지를 위해 트럭 등의 생산을 했다. 결국 어쨌거나 나치에 적극 협력한 셈이니(...) 레지스탕스에게 찍히고 '''[[전략 폭격/2차 대전#s-3.7|연합군에게 제대로 얻어터졌다.]]'''[* 루이 르노는 1942년 3월 영국 공군의 첫 폭격 당시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리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 프랑스 기업인들은 독일이나 영국이나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피점령지치고는 많은 기업들이 그냥 아무 생각없이 평소대로 경영했다. 단지 지금 자국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건 영국놈들이 아니라 독일놈들이니 독일에 대한 반감이 더 컸을 뿐이었다.] 덤으로 당시 르노 비양쿠르 공장에 가해진 폭격량은 2차 대전 최고량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공장을 복구했으나 '''1943년 4월과 9월에 걸쳐 미군에 2번이나 얻어터졌다.''' 이후 루이 르노는 1944년 프랑스 해방 후 나치 협력자로서 체포당하고 수감되었으나 이후 정신병원으로 이송,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수감된 지 4주 만에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불분명하나 공식적으론 요독증으로 되어 있으며, 수감 당시 학대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루이 르노가 나치에 협력한 덕에 르노 공장의 노동자들이 독일로 끌려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셈이다 보니 지금도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리며 르노 사조차 코멘트를 거부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편 유족들은 2011년 명예회복을 법원에 요청했단 얘기가 있다. 한편 같은 나라의 [[푸조]]의 경우, 나치에 대항해 '''스스로 공장을 폭파'''하기도 했으며,[* 처음에는 생산은 하되 10대중 6대가 불량이 나게하는 사보타주 활동을 했다. 이후 영국 SOE에서 파견된 요원인 해리 리(Harry Ree)를 통해 영국 공군이 공장을 폭격할거고 이러면 민간인 피해가 크게 날거라며 자신과 작전요원들이 폭약을 설치하여 날려버림으로써 피해를 줄이자고 장 피에르 푸조 3세의 동생 로돌프 푸조에게 제안한다. 이를 전해들은 푸조 3세가 이를 받아들여 영국 SOE 요원들이 공장에 침투하여 푸조의 생산설비를 날려버림으로써 푸조의 생산라인을 무력화시켜버렸다. 참고로 영국 공군은 푸조의 소쇼 공장을 폭격하려 했지만 오히려 민간인 백여명이 죽는 오폭을 범했고 정작 푸조 공장에는 몇개 안떨어져 별로 큰 피해가 나지 않았다고.] [[시트로엥]]은 [[페르디난트 포르셰]] 뿐 아니라 '''어떤 독일 기술자와도 중개자를 통해서가 아니면 접촉을 거부'''했고, 그나마 요청받은 트럭 생산도 '''생산속도를 느리게 하거나 여러가지 [[사보타주|태업 행위]]를 하는 등'''으로 [[게슈타포]]가 '제국의 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정도였으며, 푸조 역시 태업은 기본이고, [[영국 비밀정보국|영국의 첩보조직]]에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자금을 받기도 했고, 나중엔 한 술 더 떠서 [[V1(로켓)|V1 로켓]]의 동체 제작을 맡게 되자 '''[[도면|설계도]]를 연합국에 넘겨버렸다.''' 이런 것에 비하면 르노가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치에 부역을 한 셈이다. 실제 프랑스의 일부 사람들은 '매국노, 변절자 르노' - '애국자 푸조'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