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류샤오보 (문단 편집) === 긍정 ===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은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류샤오보가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 첫째, 개인의 안위를 포기한 채,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한 점이다. 위의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여러 번 학자로서 [[중국 공산당]] 당국과 야합하거나 해외로 나가 외국 대학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위상의 현대 [[중국]]에 맞서 싸우는 투쟁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가혹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에 넘어가서 유연한 비판만 하는 쪽으로 돌아선 생각 있는 지식인들도 매우 많았다.[* 사실 [[중국 공산당]]도 어느 정도 유연해져서, 일정 수위를 넘지 않는 비판은 별 문제삼지 않는다. 이름난 작가인 [[위화]] 같은 경우도 2017년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 자국 정치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을 했는데, 진행자인 [[김어준]]이 "작가님의 안전을 위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라며 수위를 조절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는 조국에 돌아와 독재와 불의에 항거했다. 그 가운데는 1989년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당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싸운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안문 4군자라고 불렸던 류샤오보, 허우더젠(侯德健), 저우둬(周舵), 가오신(高新) 중에서 저우둬와 가오신은 전향하여 현재 공산당의 관변학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http://china.dwnews.com/news/2013-05-29/59200916-all.html|#]][*A 현재 기사 삭제됨] 이를 보도한 둬웨이뉴스는 반중[[화교]]들이 운영하는 다른 인터넷 언론들(보쉰, 대기원시보, 칸와 디펜스)과 마찬가지로 신뢰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둘 다 [[천안문 항쟁]] 이후 정부의 회유에 넘어갔거나 적어도 타협한 것은 확실하다. 천안문 항쟁 이후 공개적인 민주화 관련 활동이 별로 없기 때문. 물론 저우둬는 아주 양심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로서 당에 개혁을 촉구하는 논문을 여러 편 썼다고 한다. 가오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으며, 근황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BBC]]에 의하면 [[미국]] 망명중이라고 하며, 다른 소스로는 중국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허우더젠(후덕건)은 고향인 대만으로 돌아간 후 정치에 일체 침묵하고 음악에만 몰두했다. 후에 2011년에서 놀랍게 [[베이징]]에서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고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때 기자들에게 "난 중국 민주화나 [[중국/인권|중국 인권]]에 관심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허우더젠은 대만 출신이었으나 1980년대 후반 중화권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여튼 당시 중화권 가요계에서 떠오르는 작곡가이었고, 절대로 듣보잡 음악인이 아니었다. 약관 20살(1976년) 나이에 [[중화민국]]의 유명한 애국가요인 <[[용의 전인(노래)|용의 전인]]>을 작곡한 것으로 잘 알려지기도 했다. 원래 이 양반의 음악은 민요에 기반을 둔 것인데, 자기 음악의 원류를 찾으러 1983년 중국 대륙을 방문했다가, 아예 눌러 앉았다. 사실상 망명한 것. 당시는 냉전기라서 귀순자가 그렇듯이 중공 정권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중국 본토와 타이완 섬은 귀순자에 대한 지원책을 모조리 없애 버렸고, 최근에는 본토인이나 타이완인이 서로의 지역에 정착하는 일이 흔하다. 2016년 [[쯔위 사태]]를 일으킨 [[중화민국]] 출신 가수 [[황안(가수)|황안]]도 1990년대 이후 대륙에서 거주하면서 가끔씩 타이완을 오락가락했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자 여기에 편승해 시위대 편에 섰지만, 학살이 벌어지자 [[호주]] 대사관으로 망명신청을 한 뒤에 고향인 타이완으로 다시 도망쳤다. 이 양반은 타이완에서 결혼한 후, 이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륙에서 다른 유명 가수 청린(程琳)와 동거하다가, 다시 애인을 남겨두고 타이완으로 망명한 후, 3번째 애인과 동거했다. 게다가 2018년에는 <[[중국몽]](中国梦)>이라는 딱 봐도 [[시진핑]]의 정책에 아부하는 노래를 작곡한 바 있다. 요약하면 류샤오보 이외에 3명은 모두 변절한 상태로 봐야 한다. 중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인 천안문 4군자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셈. * 둘째,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외망명 활동 대신, 뻔히 고난이 예상되는 모국에 머물러 투쟁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천안문 항쟁]] 지도부는 대부분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등의 명문대생이 많았던데다가 서양에서 찬양하는 민주화 운동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 망명 후 [[하버드 대학]]과 같은 명문대에 쉽게 입학할 수 있었다.[* 위에서 나온 양젠리도 UC버클리와 하버드에서 각각 수학과 경제학 박사를 땄다.] 이들은 서양에서 교수나 컨설턴트라는 안락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중국인권 문제가 불거지면 가끔씩 성명이나 발표하고 집회를 열거나,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는 정도로만 활동한다. 하지만 [[중국]]에 남아 저항하는 사람들은 생계의 위협 뿐만 아니라 혹독한 감옥살이를 10여년 이상씩 해야 하니 류샤오보처럼 자국에 남아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말로 살신성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주요 인물들인 왕단, 우얼카이시, 차이링은 망명 후에 미국으로 도피, [[하버드 대학교]]라는 미국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 수학한 뒤 대학 교수, 작가, 회사 CEO 등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물론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경한 비판을 고수하고 있으나, 말 그대로 생명을 불사르며 싸운 류샤오보에 미친다고는 할 수 없다. 류샤오보 자신도 계속 복역과 석방을 되풀이했다. 이는 [[천안문 항쟁]] 관련자들 일부가 해외 망명을 선택한 후 민주화 운동에서 손을 떼고 침묵하거나, 돈벌이에 급급하거나 혹은 심지어 [[흑화]]하여 서양 [[혐중]] 세력이나 일본 [[극우]]에 이용되는[* 이를테면 [[중국]]의 [[김완섭]]이나 [[고젠카]] 역할을 하는] 것에 비하면, 이분의 행보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변태고초(变态辣椒)[* 먹는 [[고추]]다.]라는 필명을 쓰는 반체제 시사[[만화가]] 왕리밍(王立铭)은 중국 당국을 비판하다가 [[일본]] 망명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 일본 [[극우]]와 연합했다. 즉 류샤오보는 단순히 옳은 소리를 하는 논객을 넘어, 자신을 버려가며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인민들의 공화국을 구현하려고 하였으며, 그리고 고국을 정말로 자유롭고 좋은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류샤오보는 당에 예종(隸從)하는 것이 결코 중국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는걸 삶을 통해 보여줬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아니라 류샤오보야말로 중국의 위대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류샤오보는 중국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서양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게다가 류샤오보의 민주화 운동은 테러나 무장봉기가 아니라 시위나 항의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일당 독재국가인 중국의 법률로도 사형같은 극형을 언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 정부]]가 류사오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이를 받아들일 시 공산당은 해체하거나 혹은 다당제를 인정하고 같이 선거를 해야 하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를 생각하면 된다. 이들은 쿠바 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영웅들이지만 혁명 성공 이후의 행보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체 게바라의 경우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한 후 말 그대로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으나, 피델 카스트로는 장기집권을 하면서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장단점이 드러난데다가 일단 장기 집권을 한 독재자라는 오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피델도 말년에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를 물려주고 정치에서 은퇴하긴 했다.] 류샤오보가 계속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실수를 할 수도 있으며[* 실제로 왕단이나 우얼카이시와 같은 천안문 망명객들은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여러가지 실언이나 발언의 와전으로 인해 구설에 오르는 일이 많았고, 그리하여 중국에서 이들의 인식은 거의 [[김완섭]], [[고젠카]]급이다.], 거기에 따른 비판도 나오고 지지를 철회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류샤오보를 없애버리면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중국 공산당에 목숨을 잃은 [[순교자]], 중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상징이 된다. 일례로 현재 [[이란]] 정부가 [[https://ko.wikipedia.org/wiki/시린_에바디|시린 에바디]] 변호사를 죽이지 않고, 1970, 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펼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를 죽이지 않고, 1990년대, 2000년대 당시 미얀마 군사정권이 [[아웅 산 수지]] 여사를 죽이지 않고 투옥이나 감시, 가택연금 조치를 내린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유럽 공산 정권들은 반대파를 감시하고 탄압하기는 했지만, [[루마니아]]와 [[알바니아]][* 이쪽은 정치 체제, 폐쇄성에서는 '''그 북한보다도 극심했다.''']를 제외하면 그 탄압의 정도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가택연금,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은 국외추방. 그 외의 반체제 운동가들도 혐의가 중대했을 경우에도 체포해서 몇년 가두는 정도였다. 자유노조 운동을 벌였던 [[폴란드]]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도 [[계엄령]]후에 군부정권이 들어선 이후, 1년 남짓 가택연금을 당했을 뿐이다. 냉전시절 한국에서는 북한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는 대부분 북한식인 것처럼 선전해서 그렇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북한은 [[민주 캄푸치아]] 정도를 제외하면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극단적인 정책을 펼친 국가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 집권기의 독일[* 참고로 히틀러는 193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의 선배 '''[[카를 폰 오시에츠키]]를 실제로 옥사시켰다.'''],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의 소련이나 [[마오쩌둥]] 집권기의 중국, [[이디 아민]] 집권기의 [[우간다]], [[폴 포트]] 집권기의 [[캄보디아]], 현재 김씨 왕조 치하의 [[북한]] 같은 국가들 같으면 류샤오보를 대놓고 암살 내지는 사형시키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고 간 다음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 중국은 인권이나 아시아 주변국들에 대한 패권주의 행사등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보다는 훨씬 열려 있고, 어느 정도 대외적 이미지도 고려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가들을 감옥에 투옥하거나 가택연금을 내릴지는 언정 함부로 사형시키지는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