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뤄양시 (문단 편집) === [[중세]] : 쇠퇴의 시작 === [[파일:낙양 중국 주공묘.jpg|width=840]] [[파일:중국 주공단.jpg|width=840]] 618년 [[이밀]]의 낙양 포위 당시 [[왕세충]]이 세운 주공묘. [[주공 단]]의 수호 덕분인지 왕세충과 [[양통]] 정권은 수성에 성공한다.[* 이 미담? 덕에 주공묘는 여러 왕조들에 의해 보수되었고, 마지막은 뤄양을 임시 수도로 삼은 중화민국이었다] 수나라 말기에 봉기한 [[양현감]]과 [[이밀]]은 후술할 낙양 방어의 단점을 과신해서 장안 공략의 중요함마저 내팽개치고 낙양을 공격하는 데 집착하다 실패하고 천하를 건 쟁패에서의 기선 잡기까지 놓쳐서 몰락하였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해도, 역대 왕조의 수도 후보지로서의 입지는 괜히 얻어진 게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송나라]] 때는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이라고 부르며 우대하였다. 다만 송나라의 경우 수도를 [[대운하]]와 직결되며, [[평야]]지형이지만 그물 같은 수로로 보호받을 수 있는 [[카이펑|카이펑부]]를 선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오대십국시대]] 때에 [[후당]] 왕조의 수도였던 것을 끝으로 [[송나라]] 이후부터는 수도로 된 적이 없었고, 여기에 [[정강의 변]]으로 인해 송나라가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 동부 해안으로 옮기면서 역사상에서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요나라|요]], [[금나라|금]], [[원나라|원]], [[청나라|청]]을 비롯한 북방계 왕조들이 중원 대륙 진출의 요충지인 [[베이징]]을 본거지로 삼았다. 그래서 이 때부터 중국의 정치적 중심은 카이펑을 지나 동쪽으로 점차 옮겨가 관중-중원의 내륙 지대에서 베이징 일대에 정착했으며, 경제적 중심은 강남 동부 해안 일대로 옮겼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강의 변]] 이후 도시 파괴 및 축소, 인구 감소, 인근 섬서, 산서의 건조화로 인한 기후환경의 변화가 주된 원인이지만, 기후환경이 심각하게 변해서 농사가 힘들어진 [[시안시|장안]]에 비해서는 변화가 크지 않아 별 타격을 안 입은 낙양이 중심지에서 벗어난 가장 큰 이유는 '''내부 면적이 미묘하게 좁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낙양은 보호받는 경지면적이 의외로 좁다. 장안의 것과 비교하면 1/5도 안 된다. 이는 만일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는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 조달하기 어려우므로 성 안에서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형상 주변의 평야지역에 돌출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이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도 쉬운 편이다. 당장은 안전하지만 오래 버티기 힘든 곳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수도로서의 역사도 길어서 주변 지형이 널리 알려진 탓도 크다. 수도권에 속하는 데다가 주요 관문이 평시에는 통행량이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지형에 빠삭한 사람을 굳이 현지 주민에서 찾지 않더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세에는 낙양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나 전술을 누구나 한 번씩은 연구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도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공격이 가해지므로 수비군이 버티기가 더 힘들어진다. 뤄양성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성에 대한 모든 정보, 군사적으로는 성의 첩보가 중국인들 전체에게 상시로 노출된 곳이었다는 점이다. 주로 외침을 받은 [[평양성]]이나 전략적 요충지에 성을 쌓은 [[대야성]]과 달리 뤄양은 [[서주|주]][[동주|나라]] 시절부터 시작하여 [[수나라]], [[당나라]] 시절까지도 중요 도시였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으로 방어하기에는 너무 잘 알려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전술적으로도 약점 하나만 파고들면 되는 공격측과 달리 수비측은 가능한 모든 약점을 철저하게 대비해야하기에 수비가 어려웠다. 공성전에서 공격측이 방어측 병력의 몇 배가 필요하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의 이야기이며, 공격측이 성의 특징과 약점을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 공격 방법을 골라잡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남쪽 지형에 큰 틈이 있다. 다른 방위선은 강이나 관문으로 차단되지만, 남쪽 통로는 제대로 된 관문을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통로폭이 넓다. 이 때문에 남쪽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남북조시대]]에는 [[유유(송무제)|유유]]나 [[진경지]]처럼 명장이 이끄는 남조의 병력이 종종 낙양을 탈환해서 한동안 유지한 적이 많다. 네 번째로, 의외로 수비하는 데 병력이 많이 들어간다. 낙양은 낙양성만 수비하면 전부가 아니며, 앞서 말한 관문을 수비하는 데 상당한 병력을 할당해야 한다. 흔히 알려진 관문이 호로관 정도, 추가적으로 함곡관 신관 정도지만, 낙양에는 이 관문들 말고도 관문이 상당히 많다. 오히려 황하쪽 출입구인 맹진도 장악해야 하고, 맹진 등에 배치할 수군도 필요하다. 그리고 산맥 사이를 넘어올 군대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군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것을 소홀히 하면 관문과 거점이 몽땅 함락되면서 낙양성이 포위당하는데, 이렇게 전개되면 구원군이 낙양으로 올 통로가 한정되는 데다가 적군이 점령한 관문 등을 활용해서 구원군을 차단하기 때문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기 딱 좋다. [[서진]]의 멸망 시에도 이런 약점이 작용했으며, 남조가 북조에게 낙양을 빼앗길 때에도 비슷한 과정이 전개되었다. 다섯 번째로, 하북지방과 관중지방에 각자 독자적인 정권이 수립될 경우, 위치상 끼어버리는 형태가 되어 전쟁터가 되기 딱 좋다. 당장 관중지방의 입장에서는 경계선인 동관이나 함곡관에서 조금만 더 전진하면 낙양을 차지할 수 있으며, 낙양을 점령하면 하북지방이나 다른 곳으로 갈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하북지방의 입장에서는 낙양을 차지하면 관중지방의 입구인 동관이나 함곡관을 공격할 수 있으며, 대치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상당수의 적 병력을 해당 방면에 묶어두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전조]]와 [[후조]]가 격돌할 때나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누어질 때 같은 사태시 낙양이 전장터로 변해서 폐허로 변하는 일이 많았다. 동주 시절만 하더라도, 걸어서도 지척인 거리에 정(鄭)나라가 있고 진(晋)나라가 이웃해 있어 정나라와 진나라가 강성할 시기에 낙양은 그 사이에 끼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춘추시대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존중해줬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주 천자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떨어지게 된게 지척에 있던 정나라가 주나라 영토를 찝쩍거리다가 주 천자가 모은 연합군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주왕에게 화살까지 맞춰버린 사건이었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동탁]]은 아예 낙양을 버리고 [[시안시|장안]]으로 천도하였고, [[조조]] 또한 [[쉬창시|허도]]를 수도로 삼고 [[관도대전]]으로 대표되는 원씨 가문과의 세력싸움에서 승리하여 [[조조의 하북 평정|하북을 평정]]한 이후에야 세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강남과의 접근성 문제가 있다. 당송 시기를 거치며 강남 지역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는데 뤄양과 시안은 베이징이나 카이펑 등 후대의 수도에 비해 경제와 농경의 중심지인 강남과의 교통이 안좋았기 때문에 송대 이후로는 중요성이 많이 떨어져 일개 지방으로 전락했다. [[파일:중국 낙양 4.jpg|width=800]] [[금나라]] 대에 세워져 최근에 복원된 여경문 [[파일:백마사 중국 1.jpg|width=800]] 1175년 금나라 시절 세워진 백마사 제운탑 송대에 낙양은 창건자 [[조광윤]]의 출생지로, [[서경]] (西京) 혹은 경락 (京洛)이라 불리며 삼경 (三京)[* 변경 ([[카이펑]]), 서경, 남경 ([[상추시]])] 중 하나로 중시되었다.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 영토가 된 후로도 중경 (中京)으로 지정되어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다만 [[몽골-금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되었고, [[단평의 입락]] 시에 송나라 장수 서민자가 한세기 만에 무혈 수복했을 당시에는 굶주린 수천 인구만이 남아있었다. 인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한 1만 3천의 송나라 군대 역시 곧 군량미가 바닥나 쑥과 밀가루로 연명하였다. 이에 1만 5천의 제2군이 구원에 나섰으나, 용문에 매복하던 몽골군에게 기습당하여 대패하였다. 이후 낙양성 내에 있던 제1군 역시 성을 나와 낙수에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했으나 식랑이 고갈되자 포위를 뚫고 도주하였는데, 도중 몽골군의 추격과 황하 제방의 붕괴로 인해 수백여 병사만이 [[남송]] 영토로 생환할 수 있었다. 그후 [[몽골 제국]]은 낙양을 완전 장악한 후 이어진 [[몽골-남송 전쟁]]의 기지로 활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