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뤄루이칭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의 시련 === [[파일:b603712307c7f76317d8b1503fac5580_w.jpg]] 두 다리가 부러진 채 홍위병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뤄루이칭. 1959년 루산회의 때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를 비판했던 황커청(黃克誠) 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이 경질되었다. 인민해방군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린뱌오]]는 뤄루이칭을 참모총장에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마오쩌둥은 뤄루이칭이 "패도(霸道)"적 성향이 있다고 여기고 린뱌오에게 "뤄루이칭은 칼이다. 당신은 그에게 찔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린뱌오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제안에 동의해 뤄루이칭을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이리하여 뤄루이칭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군사위원회 사무총장 겸 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을 맡아 공산당과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곧 뤄루이칭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허룽]]을 비롯한 일부 장성들은 뤄루이칭을 지지했고, [[예젠잉]]을 비롯한 다른 인사들은 뤄루이칭과 대립했다. 그러던 1965년 8월, 예젠잉이 린뱌오를 방문해 뤄루이칭 문제를 논의했다. 린뱌오는 뤄루이칭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밖에서 일을 꾸미고 있고 그의 장자는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예젠잉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주석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뤄루이칭의 일은 지금 당장은 내버려두고 나중에 중앙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린뱌오는 1965년 11월 18일 예고도 없이 5원칙을 발표했다. >1. 모주석의 업적을 배우고 익힐 것이며, 특히 모주석의 책을 전군에 배포하여 "가장 강력한 교육"으로서 전군이 숙지하게 한다. >2. '사개제일(四個第一)'[* 인적요소 우선, 정치공작 우선, 이데올로기 공작 우선, 사고 생활 우선]을 준수하고 '사상의 실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3. 주요 간부는 풀뿌리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4. 진정으로 우수한 장병을 과감히 요직에 발탁한다. >5. 강한 기술과 접전, 야간 전투 전술을 열심히 익힌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린뱌오가 제시한 5원칙을 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인민들의 숭배의식을 이용하여 마오쩌둥 개인숭배로 변질시켰고 마오쩌둥이 하는 행동은 모두 옳으며 그의 '탁월한 정치'를 따르자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에 뤄루이칭은 반대를 표명했다가 덜미를 잡혔다. 1965년 11월 30일, 린뱌오는 자신의 부인 예췬(葉群)에게 자신이 쓴 편지와 모종의 자료를 갖고 항저우에 있는 마오를 찾아가 뤄루이칭 문제를 보고하도록 했다. 당시 마오에게 보고한 정확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과 자료에 따르면 뤄루이칭이 군권을 탈취하려 한다며 뤄루이칭이 린뱌오의 군에서의 '정치우선' 주장에 반대한 것 등을 근거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마오쩌둥은 12월 2일 '탁월한 정치'에 대한 보고서를 당 중앙에 보내 "탁월한 정치를 믿지 않는 절충주의 (또는 기회주의)는 누구나 경계해야 한다."며 뤄루이칭에게 간접적으로 경고했다. 12월 8~15일, 마오쩌둥은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뤄루이칭은 원난성 쿤밍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그러던 12월 10일, 당 중앙은 뤄루이칭에게 돌연 상하이에서 열리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뤄루이칭은 영문을 모른 채 급히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 영접 나온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천페이시옌(陳丕顯)과 공군사령관 우파시옌(吳法憲)은 뤄루이칭을 회의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안내해 사실상 연금시켰다. 한편, 회의장에서는 린뱌오의 부인 예췬이 자신이 마오쩌둥과 면담한 내용을 공개하고 뤄루이칭이 1965년 6월에 사망한 공군사령관 류아러우(柳亞樓)와 밀담했다는 내용을 진술했다. 그녀는 뤄루이칭과 류아러우가 의논했다는 4가지 사안을 설명했다. >1. 린뱌오는 조만간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지 않으면 물러나게 해야 한다. 현재 물러나지 않으면 앞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 >2. (병약한) 린뱌오의 몸을 잘 보호해야 한다. >3. 이후 린뱌오는 다시는 군대의 일에 많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뤄 총장이 (군대의 일을)잘 처리하고 있다. >4. (군대의) 모든 것은 뤄(루이칭)가 관여하기 때문에 린쫑이 하는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또한 예췬은 뤄루이칭이 린뱌오를 ‘똥통을 깔고 앉아서 똥을 누울 수 없다’고 욕했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고 주장헀다. 그녀는 회의장에서 "뤄루이칭이 어떻게 린뱌오의 퇴진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세차례에 걸쳐 뤄루이칭을 성토했다. 12월 16일, 뤄루이칭은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으로부터 마오쩌둥이 12월 2일에 한 말을 전해듣고 마오쩌둥과 면담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주말에는 마오쩌둥이 만날 수 없다."고 하자 린뱌오와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런 그에게 감정적으로 대답했다. >"너무 순진하다. 당신은 너무 순진하다." 이후 린뱌오는 뤄루이칭에게 자아비판서를 작성하고 군 복무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고 뤄루이칭은 이를 따랐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중앙 사무국장과 국무위원장의 두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6년 3월 4일, '중앙 공작단'은 뤄루이칭을 고발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는데, 참석자들은 군사위 상임위, 각 본부, 공안부, 국방공사, 국방과위, 군사과 인사들이었다. 이 회의에서 뤄루이칭은 "[[마오이즘]]을 적대시했으며 독단적으로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고 반당 음모를 꾸며 군대 내 독립 왕국을 구축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3월 18일, 뤄루이칭은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3층 집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두발꿈치 뼈가 부러지는 중상만 입고 베이징 병원에 보내져 치료받았다. 뤄루이칭의 자살미수사건은 당에게 책임을 전가하려했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그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더욱 혹독해졌다. 같은 해 5월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을 때, [[류사오치]]는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陸定一), [[양상쿤]]의 '반당적 오류'를 비판하며 이들 4명의 직무를 모두 정지 및 폐지하기로 했다. 뤄루이칭은 이로 인해 중앙서기처 서기, 국무원 부총리 등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1966년 10월, 뤄루이칭은 점차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12월에 홍위병에게 붙들려 해전구 나도장의 베이징 위수구 부대 주둔지로 압송되었다. 1967년 4월 3일, 상처가 장기간 낫지 않아 해방군 총병원에 보내져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 중에 자주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조리돌림 당했고 온갖 신체적, 언어적 공격을 당했다. 1969년 초, 뤄루이칭은 왼쪽 종아리 절단과 왼쪽 넓적다리 뼈 절제 수술을 하였다.1973년 1월, 관심증고혈압 등의 병으로 입원하여 치료하였고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1973년 [[9.13 사건]] 이후, 마오쩌둥은 그를 복권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11월 21일, 마오쩌둥은 중앙군사위원회에 참석해 "린뱌오 일당의 모함을 듣고 뤄루이칭을 잘못 처결했다."라고 말했다. 1975년 8월, 뤄루이칭은 업무를 회복하여 중국공군위 고문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