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룽윈 (문단 편집) === [[중일전쟁]] 시기 === [[중일전쟁]] 발발 후 장제스가 리쭝런에게 난징에서 회담하여 일본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하자 쓰촨성의 지배자 [[류샹]]과 함께 전보를 쳐서 이는 일본과의 전쟁을 이용하여 지방군벌들을 제거하려는 장제스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리쭝런에게 난징으로 가지 말 것을 촉구했으나 리쭝런은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장제스가 중앙군을 대거 투입하는 성의를 보이자 난징으로 가게 되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중앙정부가 서남지역으로 퇴각하게 되자 37년 12월, 중앙은행 쿤밍 지점이 개설되고 국세 징수권을 박탈당하는 등 윈난성은 전보다도 더 중앙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장제스는 룽윈에게 즉각 전선에 병력을 파견할 것을 지시했고 룽윈은 1938년 1월, 3개 사단을 대일전선에 투입했으나 장제스는 룽윈의 충성심을 여전히 의심했다. 1938년, 우한에 주재하던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와 교류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윈난성의 반장 학생운동과 공산당 지하활동을 지원하였다. 우한과 광저우가 함락된 이후 윈난성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는데 윈난성에는 많은 피난민과 더불어 서남연합대학이 들어왔고 49개의 공장도 이전해왔다. 이 때문에 윈난성은 전쟁 기간 내내 국민정부의 전시통제가 제일 덜한 지역으로 남았으며 학생운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1938년, [[왕징웨이]]가 [[왕징웨이 공작|일본군의 공작에 포섭되어]] 일본 쪽으로 넘어갈 때 쿤밍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룽윈에게 [[일본군]]에 붙어 장제스에게 맞서자고 제안했으나 룽윈은 왕징웨이의 제안을 즉시 거절하고 왕징웨이에게 정신 차리고 충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왕징웨이가 듣지 않고 베트남으로 가자 장제스에게 왕징웨이의 제안을 보고함으로 왕징웨이의 편에 설 생각이 없음을 드러냈다. 1939년 2월 10일, 룽윈은 성명을 발표해서 왕징웨이의 화평운동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장제스의 항일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일본이 중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면 화평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왕징웨이가 300만원을 윈난성 재정개혁을 빌미로 룽윈에게 송금하는 등 왕징웨이와의 접촉이 아주 없진 않았고 이 때문에 장제스는 룽윈을 계속 의심하게 되었다. 왕징웨이가 아예 상하이로 가버린 후에야 룽윈은 왕징웨이와 완전히 손절매를 하게 된다. ||[[파일:중일전쟁용운.jpg]]|| || 중일전쟁 시기의 룽윈 ||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한 후 살윈강을 넘어 윈난으로 진공하려는 것을 [[클레어 셰놀트]]의 지원을 받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앙의 통제가 더욱 강해져서 1939년 시점에서 윈난성에서 자체 발행하는 신부진폐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고 1942년 시점에서 법폐만 통용되게 되었다. 1939년, 윈난성의 주요 산품인 주석 거래가 국민정부 대외교역위원회에게 장악되면서 윈난성은 계속해서 중앙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룽윈은 격노하여 신부진폐 없이는 모든 산품의 거래를 금지한다는 훈령을 내리며 저항했으나 결국 장제스에게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교역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중앙군이 계속해서 윈난에 들어오자 룽윈은 저항했으나 1940년 시점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대가로 군사위원회 전검행영주임에 임명되었다. 룽윈과 중앙의 불화는 계속되어 1940년 4월, 삼민주의청년단에서 룽윈을 독살하려다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 1944년 [[대륙타통작전]] 이후 [[리지선]]의 반정부활동을 지지하면서 장제스 타도를 도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