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루융샹 (문단 편집) === [[강절전쟁]]과 [[제노전쟁]] === 1924년 강소독군 [[치셰위안]]과 복건독군 [[쑨촨팡]]의 공격으로 [[강절전쟁]]이 일어났고 절호연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취임, 상하이 용화에 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분전했으나 패배하여 10월 13일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 얼마 후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차오쿤을 축출하자 10월 29일 심복인 [[허펑린]]과 함께 귀국하여 장쭤린으로부터 절호연군 총사령관직을 돌려받았다. 1924년 11월 24일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자 12월 3일 직예군무독판에 임명되었으나 직예성을 확보하려는 장쭤린의 의도로 인하여 톈진회의에서 원래 기반인 절강성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응하여 1924년 12월 11일 소환선무사에 임명되어 봉천군벌 [[장쭝창]]과 함께 [[제노전쟁]]을 통해 치셰위안을 축출하고 1925년 1월 난징에서 선무군을 조직, 1월 16일에 강소군무선후사의에 임명되었다. 1925년 2월 [[선후회의]]가 개최되고 루융샹의 남하가 전란을 야기할지 모른다 하여 강소성에서 그의 취임에 반대하는 여론이 퍼지자 2월 27일 강소군무선후사의라는 직책을 영원히 폐지하자는 폐독 주장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 환영을 받았다. 이에 선후회의는 루융샹의 주장을 수용하여 전국적으로 폐독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으나 돤치루이는 이를 묵살했다. 4월에 다시 강소독판에 임명되었고 강절전쟁에서 살아남은 부대를 수습하여 기반을 확보하려 했으나 군비도 병력도 장비도 턱없이 부족하여 사실상 봉군의 무력에 얹혀사는 처지가 되었다. 봉천군벌의 압력에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루융샹은 8월 5일에 봉천군벌의 [[양위팅]]에게 강소독판을 물려주고 하야했다. 비슷한 시기 안휘독판 왕읍당도 봉천군벌의 [[장덩쉬안]]에게 자리를 물러주고 하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