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록부심 (문단 편집) == 한국에서 == 유독 한국에서 록부심이 대두하게 된 원인은 국내의 특수한 환경 때문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한국은 미8군 부대 클럽에서 공연하던 1세대 로큰롤 밴드들이 한국 록의 정체성을 확립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포크가 성행한 1970년대에 집권한 [[10월 유신|유신정권]][[대한민국/문화 검열|의 문화 검열]]이 심해져 정부가 대중가요 전반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제재와 탄압을 가했다. 이 시절 포크, 그룹사운드 등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채 음악을 접은 밴드나 가수들이 많았으며 록 음악 시장이 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체되었다. 여러가지 실험으로 나날이 발전해가는 해외 록 시장과 당시 국내 록 시장을 비교하면 열악한 장비, 녹음 환경, 작곡과 작사를 비롯한 의식수준 전반이 낮은 건 사실이었다. 그나마 87년 민주화 이후 대중문화 규제가 많이 약해지고 그 시기에 등장했던 백두산, 시나위, 부활, 김현식 같은 선배 밴드, 가수들이 인기를 끌면서 간신히 한국 록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70~80년대에 유행했던 하드 록, 헤비 메탈 커버 그 이상에서 발전하지 못하였다. 또한 헤비 메탈의 중흥기라 불리던 80년대 중·후반에 왕성히 활동하던 해외 밴드들의 활동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음반만 듣다보니까, 록을 알려면 굉장히 많은 지식을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진입장벽만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 록밴드들조차 저항정신과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가짐으로 무장하다가 록부심이 형성된 나머지, 라이브 무대가 아닌 방송 출연을 록밴드답지 않은 행동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으며, 다른 밴드들을 적대시하는 분위기도 형성된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공연장에 놓인 다른 밴드의 앰프에 물병을 올려놓는 행위를 상대 밴드에게 시비를 거는 행위로 간주할 정도였다.] 이후 80년대 후반, 90년대에 여러 록밴드, 메탈 밴드들이 주목 받았지만 댄스, 힙합에 주도권을 빼앗기며 록 음악은 성장을 멈추었다. 물론 록이 완전히 버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주류 대중가요에 편입된 록 장르는 소위 [[록발라드]]라 불리는 장르이다. 그 대표 사례가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음반 반품 사태. 요약하자면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단 아쉬움, 장르 자체가 지니는 저항 정신, 메인 스트림을 장악한 다른 장르들을 향한 증오, 한국의 문화 검열 현실 때문에 크지 못한 록 문화에 대한 절망, 비주류 장르를 좋아하면서 생긴 열등감 등이 합쳐져 록부심이 형성되었단 의견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대중음악의 대안으로 인디 록이 주목받으며 인디 록 시장과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었지만 2005년 발생한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 때문에 록 시장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후 2000년대 후반부터 [[장기하와 얼굴들]]을 필두로 한 포크 록, 모던 록 밴드들이 주목받으며 다시 성장하였지만 펑크 록, 메탈을 비롯한 헤비니스 장르는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여담으로 국내 록부심 문화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로 [[문희준]]이 꼽힌다. 그가 초기에 100만 안티를 끌어모으게 된 이유는 한국의 1세대 아이돌이었던 그가 H.O.T. 해체 후 솔로 선언을 하면서 택한 장르가 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서식하던 록부심 넘치는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가 한 인터뷰나 발언 중 몇 구절이 부적절한 드립으로 왜곡되거나 와전되고, '빠순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일부 몰지각한 팬들의 무분별한 옹호 발언이 더해져 '문희준 어록'이 생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문희준은 크나큰 마음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들을 용서하고 묵묵하게 군복무를 수행한 후 문보살이란 별명을 얻으며 까임방지권을 획득한 상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