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군 (문단 편집) ====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그리고 내전기 ==== 마리우스의 집권 이전, 시민군의 의무를 지는 자영농을 바탕으로 하던 로마군은 [[라티푼디움]]의 확산과 자영농의 몰락으로 인해 인적 자원이 고갈되며 전투력이 저하되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마리우스가 군제 개편을 하기 전 로마군은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침공에 처참하게 무너지기까지 했다(킴브리 전쟁). 지중해 패권국의 군대가 붕괴되는 것은 패권의 연쇄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로마에게는 희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재산에 따라 징집하던 관례를 없애고, 무산 계급에게도 군복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임금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지급하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우리가 교양서에서 나타나는 만큼 극적인 변화가 아니고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던 로마군의 완성이 그의 대에 기본적으로 끝났다는 거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무산 계급에게도 군복무의 길을 열었고, 잡다한 병종을 없애고 레기오나리, 즉 중장보병만으로 구성한 간단한 군사 조직을 만들었으며 나머지는 동맹국 병사들에게 의존하게 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아퀼라]]([[검독수리]])를 로마군의 상징으로 정한 것도 그였다. 재편된 로마군은 거짓말처럼 게르만족을 완벽하게 격파했다. 물론 마리우스 본인의 군사적 역량이 뛰어났 덕분도 있었겠지만. 이 개혁으로 인적 자원 고갈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이 군단은 국가가 세금을 모아 병사들에게 급여를 주는 근현대적인 상비군이라기보다는 유력자가 사적으로 고용해 일종의 계약직으로 운영된 것이 이 시기 로마군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원래는 평시에도 일정한 숫자의 병역대상자들이 해마다 번갈아가면서 징병되어 집정관의 지휘를 받으며 복무를 했지만, 공화정 후기 들어서 싸움 잘하고 밥 잘먹이고 돈 많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집정관처럼 군대를 거느릴 수있게 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이 전리품을 배분해 주거나 돈을 더 많이 주는 군 사령관에게 충성하는 [[사병]]이나 [[용병]]처럼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소위 마리우스의 개혁이 실존했는가 - 그리고 그것이 사병화를 불러왔는지는 현대에 들어서 점차 폐기되어가는 학설이다. 2020년을 전후로 학계는 마리우스 개혁의 실체와 사병화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으며, 그보다는 동맹시 전쟁과 내전기가 사병화를 불러왔다고 보는 쪽이 늘어가고 있다. 위에 적힌 서술처럼 마리우스가 모든 개혁을 한 것도 아니었으며 '개혁'이후로 적극적인 사병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는 자진해서 군단을 해산했고, 많은 지휘관들 역시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무산자가 개혁 이후로 모두 군대에 갔다는 것 역시 증거가 없다. 공화정 후기, 군사령관들은 휘하 퇴역병들의 복지를 보장해 줌으로써 지원병의 자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일단 상당한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피비린내나는 격전에서 함께 싸우면서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우'라는 인간적인 유대감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내전기》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는 마리우스 개혁과 꽤 시간적 차이가 나므로 마리우스의 '개혁'이 곧바로 이런 유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일례로 로마 최초의 황제나 마찬가지인 술라나 폼페이우스 모두 병사들을 선동하거나 혹은 아예 자비로 군사를 꾸려서 커리어를 쌓아나갔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개혁'과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병력 근간이 된 갈리아 속주 병사들 역시 카이사르가 자체적으로 모아서이지 계급과 큰 연관이 없으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내전기에 모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아예 경매하듯이 연봉을 높이 부르면서 병사들을 끌어 모을 정도였다. 원로원 의원으로서 정계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군사령관들은 잠재적으로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 있는 퇴역병들의 생계를 보장해서 지속적인 지지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물론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루쿨루스]]처럼 그냥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적은 봉급만 주었을 뿐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루쿨루스는 그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6세|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병사들의 반항과 파업으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전공을 빼앗기고, 차후의 정치적 입지도 불안해지는 등의 대가를 치렀으므로 야심있는 군사령관치고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지 않은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따라서 군사 지휘관 - 특히 폼페이우스는 퇴역한 병사들의 생계 대책을 위해 정착지와 식민지를 달라고 요구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러한 요구에는 대체로 무감각하거나, 뭉그적거리며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로원 입장에선 무산자들이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폼페이우스를 견제하기 위해서인 탓이 컸다.[* 술라의 경우에는 술라가 대놓고 독재관에 취임해 퇴역병 토지 분배를 처리했다. 하지만 의외로 퇴역병들 중엔 분배받은 토지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땅을 뺏긴 동맹시나 속주 역시 불만이 컸다.] 당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병사들에게 식민시의 땅을 나눠주는 건 오래되고 합법적인 관행이었다. 로마 공화정과 원로원은 이미 그 옛날 베이이 시를 점령하고 식민시를 세울 때부터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폼페이우스가 술라 2가 될까 우려한 원로원의 견제라고 봐야 한다.[* 사실 카이사르 못지않게 초창기 폼페이우스 역시 불법적으로 군사 커리어를 시작했다. 후대의 일로 공화정파라는 이미지가 붙긴 했지만, 야심이 별로 없었다는 점만 빼면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나 초기 행보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당시 원로원의 이 같은 견제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손을 잡았고 퇴역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줄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알겠지만 퇴역병의 땅 분배 문제는 징병 재산 조건 하한과는 큰 관련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퇴역병 중에는 오랜 군생활로 인해 농사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기껏 받은 토지가 쓸모없다거나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처분하고 다시 상경하는 경우[* 이건 명군 취급을 받는 아우구스투스 때도 생긴 일이다.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군단병의 반란 명분도 쓸모없는 토지 분배와 노역이었다.]도 빈번했다. 메리 비어드의 책을 참조하면 술라의 퇴역병 중엔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끼어들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땅을 포기한 그들은 결국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의 사병 노릇을 하게 된다. 아무튼, 명장들 휘하에서 빈털터리였다가 타국을 약탈하거나 상여금을 받아 인생을 바꾸는 재미를 알게 된 병사들의 눈앞에는 훨씬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들어왔다. 바로 지중해의 모든 재물이 모여든 조국 로마였다. 야심많은 군사령관들은 이런 보상 심리를 이용하여 로마군이 조국을 향해 칼을 휘두르도록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외세의 힘을 빌리는 매국행위도 아니고 어차피 내부 정치 다툼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군단 병사들은 야심 많고 능력도 좋은 군단 사령관들의 의중에 쉽게 동조하였다. 이후, 군사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가 연속으로 벌어졌으며, 이 시발점은 [[술라]]의 로마 진군이다.[* 단, 술라의 진군은 소위 말하는 킨나의 민중파가 오히려 술라의 군권을 불법적으로 빼앗은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이게 불법이라는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킨나가 무조건 술라의 군권을 뺏은 것은 아니고 엄연히 민회를 통한 적법절차를 통해 마리우스에게 가져온 것이기 때문. 단지 술라에게 군권이 있고 이는 전쟁 도중에 함부로 뺏지 않는다는 관습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다.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냅다 로마에 꼴아박은 술라의 불법에 미치지는 못 하겠지만.]. 술라 이후에도 많은 장군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고 그들 중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장군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등이었고 이들은 서로 [[내전]]을 벌이는 형태로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이러한 내전이 지속되다 [[옥타비아누스]]가 정국 불안정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통치에 나섬으로써 공화정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제정, 즉 원수정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