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문단 편집) === [[고대 로마]] === * 참고: [[로마 왕국]],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파일:external/ravenseniors.wikispaces.com/5044776493_9489b0db0a_z.jpg]] 로마에 [[사람]]이 거주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14000년경의 것으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집단]]이 거주하다 팔라티누스 언덕의 [[마을]]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이 합쳐져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추측이다. 도시 로마의 기록된 역사는 [[도시국가]]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2> [[파일:1481px-Map_of_ancient_Rome.svg.png|width=100%]] || || '''{{{#0000FF 파란 선}}}'''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세르비우스]] 성벽 || || '''{{{#FF0000 빨간 선}}}''' ||기원후 3세기에 지어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 전통적으로 일곱 [[언덕]]의 도시로 불렸고 세르비우스 성벽이 이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후 도시가 확장되어 테베레 강 서안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때 [[유럽인]]들에게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자 유럽의 수도였다. [[로마 제국]]이 곧 세계였으니 말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영어: All roads lead to Rome, 라틴어: Omnes viae Romam ducunt)'[* 같은 목표에 도달하는 데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속담이 로마의 위상을 말해준다. 한편 초창기 [[기독교]]에서는 서기 [[1세기]] [[예수]]의 [[사도]]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하면서 로마 지역 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위 교회로[* 이 부분은 가톨릭-정교회-개신교 간의 교의적 논쟁까지 얽혀있어서 정말 조심스럽게 언급해야 하지만, 가톨릭의 교황권 신학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역사학적으로는 늦어도 AD 1세기 말에는 '로마 교회가 뭔가 특별하다'는 인식이 그리스도교 세계에 자리 잡았다.[br]「The slow growth of papal influence began no later than ca. 95, when the church of Rome intervened to settle a dispute at Corinth, and as the Protestant historian Harnack observed,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br]{{{[}}}교황의 영향력의 느린 성장은 늦어도 기원후 95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로마교회는 코린토의 논쟁을 해결하는 데 개입하였다. 개신교 역사가 [[https://en.wikipedia.org/wiki/Adolf_von_Harnack|Harnack]]이 관찰했듯이,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교황수위권|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br]-[[https://en.wikipedia.org/wiki/Jeffrey_Burton_Russell|Jeffrey Burton Russell]], 《Medieval Civilizati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5, p.69] 부상하며 기독교의 중심지라는 역할을 함께 수행하게 된다.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교황권이 확립되어 가면서 [[교황]]의 거처로도 인식되게 된다. [[사두정치]] 시절부터 서로마 황제들은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박힌 로마 시보다는 북부의 [[밀라노]]에서 집무를 봤다. 결정적으로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구 비잔티움을 6년간의 공사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재건축하며 동방 지역의 본부가 새로 세워졌다. 그 이전 [[사두정치]] 시절의 [[니코메디아]]도 동방 본부 역할을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수년간의 대공사를 벌이지는 않았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한국의 도시 개발에서도 신도심이 건설되면 기존 [[구도심]]의 도시 역량을 흡수해서 구도심이 쇠퇴하듯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기존 로마 시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점 성장하는 만큼 로마 시는 점점 수축해 갔다. [[4세기]] 들어 로마 시에서 인구가 빠지면서, 기존에는 인산인해였던 [[인술라]](원시적인 아파트) 및 각종 공공시설들이 그 용도를 잃어갔고, 귀족들은 그 건물 및 용지를 자신들의 사저로 용도변경했다.[* 출처: [[https://bmcr.brynmawr.edu/2012/2012.11.57/|#]] 'Bryn Mawr Classical Review'라는 학술 사이트에 사학자 Raymond Van Dam이 'Two Romes: Rome and Constantinople in Late Antiquity'에 관하여 투고한 리뷰에는, 'At Constantinople imperial patronage shaped the urban space, but at Rome aristocrats appropriated for their own private use public building materials such as statues and decorations, public spaces such as streets, and even the public water supply. Machado also gives examples of multiresidential buildings (insulae) that were converted into large aristocratic residences.'라는 대목이 있으며, [[https://oxford.universitypressscholarship.com/view/10.1093/acprof:oso/9780199739400.001.0001/acprof-9780199739400-chapter-6|##]] 해당 출판사(옥스포드 대학 출판부) 사이트에 올라온, 바로 위 리뷰한 서적 'Two Romes'의 디지털판 책 중 한 챕터의 서문에는 'This study shows how the boom in aristocratic housing in fourth-century Rome involved the progressive takeover, on an unprecedented scale, of public space by private interests.'라는 대목이 있다.] [[375년]] [[훈족]] 침입의 연쇄 효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로마 제국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훈족의 압박을 받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대규모 무리를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서 로마 제국 영내인 [[트라키아]]로 침입하였고 [[378년]]에 로마 제국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방 정제인 [[발렌스]]가 전사하고 [[동로마]] 중앙군이 모조리 궤멸하는 대참사를 겪게 된다. 그 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집권해서 일시적으로 고트족과 [[휴전협정]]을 맺고 단일 황제로 등극하지만 395년 급사하고 그의 두 아들 중 작은아들인 [[호노리우스]]가 서방 황제로 즉위한다. 그는 부유하고 강력한 동로마에 비해 누더기가 된 서로마를 통치할 능력이 없었으며, 동서 정부의 협조체제는 완전히 마비되어 서로마는 크게 흔들린다. 어떻게든 서로마를 지탱하려고 노력하던 [[스틸리코]]가 처형된 직후, 서고트족의 약탈을 피해 [[서로마 제국]]은 수도를 메디올라눔에서 [[라벤나]]로 옮겼지만 서고트족은 수도 라벤나 대신 로마 시로 쳐들어가 [[알라리크|410년 로마 약탈을 일으켰다.]] 이로인해 서로마 제국은 치명타를 입었고 이어 452년에는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공격을 받을 뻔 했지만 교황 [[레오 1세(교황)|레오 1세]]의 설득으로 회군함으로서 로마 시는 위기를 피한다. 하지만 [[455년]] [[6월]] [[반달 왕국]] 군대에 의해 다시 한번 침략을 받아 [[가이세리크|두 번째로 로마가 약탈]]당하는 사태는 교황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