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렌 (문단 편집) === 근대 === [[1737년]],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거래로 프랑스가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국]]) 공작 [[프란츠 1세|프란츠 슈테판]]([[프란츠 1세]]|프랑수아 에티엔)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승낙하는 조건으로 로트링겐 공국은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장인이자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의 부친으로 옛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인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에게 넘어갔다. [[로렌 공국]]은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사후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며 [[프란츠 1세]]는 [[대토|공국을 내준 보상]]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작위)|대공]]이 되었다. [[로렌 공국]]의 프랑스 합병 이후 이 지역에서는 [[프랑스/문화|프랑스화]]가 진행되었으며 [[1769년]]에는 대학교가 세워지고 [[낭시]]와 생디에는 주교좌가 되어 프랑스에 일부가 되어 갔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지역들이 뫼즈, 모셀, 메르테, 그리고 보주 데파르트망들로 행정 개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 [[1790년]]에는 로렌의 대표들이 로렌에 독일계 자치 데파르트망들의 수립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이후 [[1871년]]까지 로렌의 역사는 프랑스 다른 지역들의 역사와 함께 흘러갔다.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독일로 넘어간 로렌 지역의 이 시기 역사, rd1=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알자스-로렌 지도.png|width=100%]]}}} ||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전의 데파르트망 ||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 제2제국]]이 패전하고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자 로렌의 일부[* 뫼르트 일부와 모젤 대부분]는 신생 [[독일 제국]]에 할양되고 남은 뫼르트와 모젤 데파르트망은 [[뫼르트에모젤]](뫼르트와 모젤) 데파르트망으로 재구성되었다.[* 뫼르트에모젤 데파르트망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데파르트망으로 유지되고 있다.] 보불전쟁 직후, 할양된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에서는 프랑스 국적을 유지하고자 한 [[프랑스인]]들이 추방되어 로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메스(프랑스)|메츠]]에서만 약 2만명이 떠났으며 이 시기 [[낭시]]는 인구를 두배로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로렌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서부전선의 참호선이 로렌을 가로질렀고 [[베르됭 전투]]와 같은 대규모 전투들도 로렌 위에서 일어나면서 피해를 입었기 때문. 이러한 피해의 기억 때문인지 전후 [[전간기]]에 수복된 로렌의 독일-프랑스 국경에는 [[마지노선]]이 로렌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구축되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순식간에 항복하면서 [[1940년]]에 로렌은 [[알자스]]와 함께 [[나치 독일]]에 병합되었다. 이 결과로 병합된 모젤 데파르트망의 주민들은 나치 독일에 의해 징집당했다. 그리고 로렌은 [[1944년]], [[1945년]]이 돼서야 해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