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콩키스타 (문단 편집) === 발단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62.tinypic.com/zn0d2c.jpg|width=100%]]}}}|| 722년 피레네 산맥 기슭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300명의 서고트 잔존 세력이 2,000명가량의 아랍 군대의 침공을 막아낸 [[코바동가 전투]](Battle of Covadonga)의 승전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레콩키스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레콩키스타의 시작년도라고 언급된 711년은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이 시작된 해이다. 718년경 우마이야 왕조는 정복 작업을 거의 끝마쳤다.] 서고트 왕국의 피난민들은 명맥을 존속할 수 있었고, 이후 이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살아남은 서고트족들이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립하여 이베리아 북서부에 대한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 이후 [[레온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며 분할 상속된 나라 중 하나가 [[카스티야]]로 발전하게 된다. 서고트의 멸망에서 배운 게 없는 건지, 초기 레콩키스타 국가들은 게르만의 분할 상속제를 버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스투리아스는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레온, 나바라, 카스티야 등으로 왕자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가 합쳐졌다가를 반복했다가 결국 카스티야로 수렴된다.]의 규모나 군사적 위상은 이베리아를 장악하던 이슬람 왕국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이슬람 왕국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는데, 첫째 이유는 카탈루냐 일대를 두고 전쟁을 벌이던 프랑크 왕국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이슬람 왕국 내부에서의 분열, 특히 기독교인들과 [[베르베르]]인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이베리아를 점령한 이슬람 왕국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불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성당들을 파괴하거나 모스크로 바꾸어[* 이슬람 역사가들은 술탄이 기독교도들로부터 코르도바 대성당을 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말이 구매지 이슬람에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반론도 있다.] 기독교도들이 미사를 드리기 힘들게 했고, 개종했는데도 종교세를 내라고 하거나[* 사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종교세를 피하려고 이슬람교로 개종했기 때문인데 --1300년대엔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90%에 달했다.-- 1300년대에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90%에 달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1300년대에는 스페인 지역 총 면적의 90%에 달하는 지역을 카탈루냐 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이 재정복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도 전체 스페인지역 90%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유일한 나라인 후우야미야 왕조가 있었지만 후우야미야 왕조는 지즈야만 잘 내고 권력에 순응만 하면 종교의 자유를 제한적이나마나 보장했으므로 국가 내 기독교 비율이 최소 30%는 존재했다. 그래서 이슬람 왕국의 지도자들로써는 중요한 수입원인 종교세가 줄어드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종교세 지즈야를 거두는 것은 스페인의 이슬람 왕조만 했던 일이 아니고 전 세계의 아주 많은 이슬람 왕조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다. 스페인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종한 기독교도들한테만이 아니라 후술하듯이 이슬람교 확장 초창기 때부터 개종했던 베르베르인들에게도 이런일들이 벌어졌다.], 반발하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공개처형 및 직위와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박해를 가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거들었다.[* 물론 유대교도들이나 후술하듯이 종교세 문제 관련해서 이슬람교도들인 베르베르인들도 아랍인들에 반대하면 얄짤없었다. 그러나 베르베르인들은 워낙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유대교도들이나 기독교도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서고트 왕국]] 항목 참고.]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가지게 되었고 813년의 코르도바 반란이나 912년의 팜필로나 반란 등의 크고 작은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기를 통제당해 무장은 제한되어 있었고, 이슬람 왕조들은 쉬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베르]]인들의 반란은 달랐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 계열 왕조였고,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들도 다들 아랍인들이었으나, 일부 호족이나 대부분의 군인들은 베르베르인이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베르베르인들을 야만인이라면서 극도로 무시했다. 베르베르인들은 아랍인들이 안전한 후방에서 성이나 지키는 동안 기독교인들과의 최전선에 나가서 피를 흘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보상은 아랍인들에 비해 적었으며[* 아랍인 귀족들은 풍요로운 스페인 중남부의 영토를, 베르베르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습하고 험한데다가 기독교들과의 최전선인 갈리시아 등의 북부 지방의 영토를 받았다.], 심지어 종교세도 강요받아야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때 베르베르인들은 무슬림들이었다. 아랍인들의 이러한 차별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들고 일어났으며 739년, '귀족 전쟁'이라 불리우는 내분을 이베리아 반도 각지와 마그레브 지역에서 전개한다. ([[베르베르 대항거]]) 이러한 내전은 743년까지 이어졌고, 우미이야 왕조의 쇠퇴를 촉진시켰다. 아랍 군대들은 베르베르 반군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지만 마그레브 지방은 위낙 넓은 데다가 베르베르의 홈그라운드니만큼 대부분의 땅을 빼앗기고 만다. 그 와중에, 스페인의 베르베르 귀족들이 귀족 전쟁에 참여하느라 군대를 움직인 틈을 타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횡재다!'''를 외치며 텅 빈 [[갈리시아]] 지방을 접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