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콩키스타 (문단 편집) === 종교적 공존과 충돌 사이 === >중세 초기 스페인은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한 국토 안에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문화(多文化) 사회였다. 그러나 각 문화 간 통합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코란》은 무슬림들에게 기독교도와 유대인이 "성서의 민족들"(Peoples of the Book)이므로 관용을 베풀라고 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관용은 제한된 것이었고 ㅡ 이슬람 지배하의 기독교도들은 새 교회를 지을 수 없었고, 교회의 종을 울릴 수도 없었으며, 공적인 종교 행렬을 거행할 수도 없었다 ㅡ 때로는 완전히 무시되기도 했다. 1066년 그라나다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져 그곳의 유대인 공동체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1126년에는 수천 명의 기독교도들이 모로코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알-안달루스의 아랍 문학작품에서는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을 철저히 거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중세 이슬람 스페인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의 관용적인 사회였다는 주장은 근대시대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 >'''기독교도 지배하의 무데하르나 유대인들의 처지도 그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원칙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효용성 때문에 마지못해 관용되었다. 즉 그들은 기독교도들에게 유용한 존재인 한에서 관용되었던 것이다. 세비야는 이 점에서 좋은 예를 제공한다. 1248년 페르난도 3세의 "인종 청소"는 세비야를 순수한 기독교도들의 도시로 만들려는 의도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수년 후에는 이교도들을 쫓아내고 기독교도 정주자로 그들을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거주가 다시 허용되었다. >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 있는 전 시기를 통하여 지배 집단은, 그것이 이슬람 교도든 기독교도든 간에 지배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비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종교적, 문화적 소수 집단은 거기에서 그들이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그동안 관용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배 집단의 확고한 통제에 예속되었다.''' >---- >Raymond Carr 외[* Raymond Carr, Sebastian Balfour, Roger Collins, A.T. Fear, Felipe Fernández-Armesto, Richard Fletcher, Richard Herr, Henry Kamen, Angus Mackay] 지음. 김원중·황보영조 번역.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82285|《스페인사》]]{{{-2 [[https://www.amazon.com/Spain-History-Raymond-Carr-dp-0198206194/dp/0198206194/ref=mt_other?_encoding=UTF8&me=&qid=1648562888|(《Spain: A History》)]]}}} 111-113쪽 기존 스페인의 카스티야 중심, 가톨릭 우월 교권 민족주의 (nacionalcatolicismo)가 20세기에 들어와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세속주의자, 지방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가톨릭 공동왕 이후 제국, 왕정 시대 내내 이슬람, 무어인과 관련된 모든건 나쁘고 비스페인적인 것으로 취급하던 경향도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1948년에 [[프랑코 정권]]을 피해 망명해 있었던 역사학자 아메리코 카스트로가 《España en su historia》[* 영어권에는 《The Structure of Spanish History》, 즉《스페인사의 구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를 출판하면서 '''이슬람을 몰아낸 가톨릭 공동왕과 그 이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교적 폐쇄성과 광신으로 인해 실패한 체제'''라 비판하고, 반면 서로 전쟁은 해도 기독교권이나 이슬람권이나 자국 내 이교도 커뮤니티를 아예 없애려는 전반적인 시도는 없었던 레콩키스타 시절 중세를 '''세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빛나는 문화적 발전을 이룩한 황금기'''로 재조명하는 사관이 한동안 유행했다. 이는 마르틴 루터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열풍에 맞서 매우 강경해진 [[대항종교개혁|가톨릭 수호]] -종교재판-이단심문을 특히 근세 스페인에서 주도하게 된 것에 대한 반동심리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이런 가톨릭 유일주의 근세 스페인을 부정하고, 중세적 종교적 관용과 다양성을 낭만적으로 보던 사관도 스페인 사학계가 근대성 논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학적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에 와서는 많이 퇴색되었다. David Nirenberg 같은 중세 스페인 사회사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학자들의 현대적 공론은 집요하게 가톨릭 유일신앙을 추구한 근세에 비해선 확실히 중세 레콩키스타 시대가 종교적 다양성이 있었지만, 실리적 이유에서 공동체내 이교도의 존재를 '참고 견디는거지' 타자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존중에 기반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은 결코 아니었고, 레콩키스타 자체가 800년짜리 장기 과정이었던 만큼 타 종교에 대한 관용도도 시대에 따라 빡빡해졌다 느슨해졌다 반복하는 케바케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출신 자체가 바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가문이었던 [[후우마이야 왕조]]의 경우, 이교도와의 문화적 교류와 공존에 익숙했지만, 반대로 발원지가 원래부터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짙었던 시리아, 레반트 일대가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던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같은 베르베르계 국가들은 이념 자체가 종교적 원리주의, 순수주의를 구심점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적 개혁운동으로 시작했던만큼 불관용이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현대 이베리아 반도 중세 사학계에서는 보통 [[흑사병]]을 이후로 그 이전에는 심해졌다 느슨해졌다 반복하던 기독교권의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이 전례없이 강해지며, 이런 기조가 후기 트라스타마라 왕조 르네상스 시절까지 유지되고, 나머지 유럽 기독교 세계도 종교재판의 설립, [[알비 십자군]] 같은 기독교 내 이단 박멸 체계가 더 완성되면서 결국 1492년 <알함브라 칙령>과 비개종 이교도 전면 추방, 이후 [[종교재판소]]를 통한 개종자 박해와 [[무어인 추방]]으로 정점을 맺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근대 자유주의자가 자기 시대에 대한 불만을 엉뚱하게 중세에 투영하여 만든 '관용적인 중세 이슬람, 비관용적인 중세 가톨릭'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탈피하여, 스페인 민족주의도 아니고 가톨릭 근본주의도 아니며 순진한 무슬림 미화도 아닌 실증적인 설명을 내놓고 있다. 600년쯤 이어진 무슬림계 이베리아 국가들과 500년 넘게 이어진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을 비교하여 "누가누가 더 잘못했냐"를 따지는 것은 역사학과 거리가 먼 질문이다. 수백년 간 이어진 체제에서는 강경한 순간들을 양쪽 어디에서든 얼마든지 취사선택할 수 있으며[* 예: 가톨릭 스페인의 1609년 무어인 추방, 1066년 이슬람 그라나다의 유대인 학살] 각각의 정치적, 상황적 이해관계에서 관용과 불관용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었다. 더군다나 중세와 근대의 비교가 아닌 동시대 중세 스페인 안에서 가톨릭 지역과 무슬림 지역을 비교할 경우 이 점은 더 명백해진다. 동시대 중세 스페인에서 기독교 치하 무슬림과 이슬람 치하 기독교인의 처지는 비슷했으며, 양쪽은 모두 '원칙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효용성 때문에'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또한 소위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은 알 안달루스라는 국명이 무색할 정도의 중세 이베리아 특유의 오랜 지방세력 간 군웅할거와 합종연횡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위정자에게 일관성 있는 종교 탄압을 할 능력이 부족했던 결과였을 뿐 결코 자비심이나 인권의식에서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