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콩키스타 (문단 편집) ==== [[1492년]] 마무리: [[알함브라 궁전|알함브라]]를 떠나는 무어인들 ==== [[1469년]]에 아라곤 왕국의 왕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이사벨이 결혼하며 양국의 연합이 가시화 되었다. 그리고 1474년에 이사벨이 카스티야 왕이 되자 페르난도는 공동왕이 되었고 1479년,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으로 즉위하자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이 탄생하였다. 교황은 그들에게 가톨릭 군주라는 칭호를 주며 그라나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482년, 그라나다 왕국 (나스르 왕조)의 술탄 핫산에게 페르난도 2세는 평화를 대가로 조공의 양을 늘리라 요구했다. 애초에 강경파에 속했던 핫산은 그에 불복하였고 조공 비용으로 무기를 제작했다. 이에 카스티야 군대가 그라나다 겨우 30여 km 떨어진 알하마를 공격했다. 그러자 그라나다에서 반란이 일어나 핫산이 추방되었고 그의 아들인 보압딜이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XII_of_Granada|무함마드 12세]]로 즉위했다. 한편, 핫산은 동생인 엘 사갈의 영지인 [[말라가]]로 피신했다. 이후 그라나다와 말라가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핫산은 기독교 군대와 연합해 보압딜을 패배시킨 후 복위하였다. 그라나다 내전을 틈타 카스티야 군대는 그라나다 왕국 깊숙히 진격했다. 1484년 6월에 알하마, 같은 해 9월에 세테닐이 함락되었다.[* 그중 세테닐 공성전은 [[미디블2: 토탈 워]]의 역사적 전투로 재현되었다.] 동시에 페르난도 2세는 보압딜을 석방하며 그라나다 내전을 재차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1485년]] 5월, 그라나다 왕국의 서부 요충지인 [[론다]]가 함락되었고 이에 핫산은 재차 폐위되었다. 그리고 그의 복위를 도왔던 동생인 엘 사갈이 무함마드 13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 역시 1486년에 로하, 그리고 결정적으로 1487년 8월에 그의 세력 기반이던 말라가를 상실하자 폐위되었다. 따라서 그의 조카인 보압딜이 복위하였고 카스티야 군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489년에 바자[* 여기는 엘 사갈이 지켰다. 그는 1490년에 카스티야에 투항한다]와 알메리아까지 함락되며 무함마드 12세의 영토는 그라나다 일대로 축소되었다. 무함마드 12세는 페르난도 2세에게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켰으나 돌아온 대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그라나다의 도움 요청은 모로코, 이집트 등지에 전해졌고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파병하진 않았다.[* 이때 맘루크의 술탄은 카이트베이였는데 오스만과의 전쟁을 위해 아라곤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랬기에 그라나다의 구원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1491년 4월에 그라나다 포위가 시작되었고 8달이 흘렀다. 그라나다의 식량이 떨어지자 무함마드 12세는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은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항복했으며, 11월 25일에 가톨릭 국왕들과 그라나다 조약을 체결하였고 페르난도 2세는 무함마드 12세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1492년]] 1월 2일에 성문을 나와 선조들의 땅인 북아프리카로 향하니, 782년간 지속된 스페인에 대한 이슬람 지배의 종결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