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바논/역사 (문단 편집) == [[근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베이루트)]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파크르 앗 딘 2세)] ||[[파일:레바논 유수프 파샤.png|width=300]]||[[파일:오스만 레바논.jpg|width=291]]||[[파일:레바논 정세 1774.png|width=258]]|| |||||| 유수프 파샤 (사이프 가문), [[파크르 앗 딘 2세]] (마안 가문), [[자히르 알 우마르]] (자이다니 가문)의 자치 공국들 ||||||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격파한 이후 오스만 제국의 땅이 되었다. 1516년 시리아 정복 후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 시대의 [[시돈]], [[베이루트]] 윌라야를 합쳐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도) 산하의 시돈-베이루트 산작(Sanjak)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중동의 일반적 이미지와 달리 협소한 산악지역이다보니 [[동방 가톨릭]] 계통인 [[종교적 소수자]]들인 마론파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교역하는 베네치아, 제노바 상인들은 무슬림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는 정교회 신도들이나 동방 가톨릭 신도들과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고 이 때문에 레바논 해안지역의 정교회 신도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기독교를 유지했다.[* 같은 맥락에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과 교역하려는 유럽인들의 주 교역 파트너 역할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정교회 신도들은 마론파와 마찬가지로 [[교황수위권]]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들은 안티오크식 그리스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으로 갈라져나온다. [[마론파]] 공동체 역시 유럽과의 교류가 점점 더 활발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18세기 중반까지는 마론파 사회는 소군주들이 지역 사회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졌으며 주교와 대주교에 대한 임명권도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6세기 그레고리우스 8세가 마론파들을 지원한 것을 계기로 일부 마론파 성직자들은 로마로 유학할 수 있었고, 로마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성직자들을 자신들의 입지와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은 레바논에 대학들을 설립하였고, 마론파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은 점차 체계적인 관료 집단을 구성하기 이르렀다. 마론파 성직자들은 교회 예하 학교를 운영하고 지역 소군주들에 대항한 농민들의 봉기를 선동하였고, 이는 기존의 지방분권화되었던 마론파 사회가 중앙집권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