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바논/역사 (문단 편집) == [[고대]] == [[페니키아]]의 땅으로 페니키아의 중심도시인 [[티레]], [[시돈]]은 [[고대 이집트]]에 목재를 수출하면서 지중해 최대의 무역 도시로 번성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최초로 [[갤리선]]을 사용하여 무역한 민족이자 최초로 [[표음문자]]를 개발한 민족으로도 알려져 있다. 바이블의 어원이 된 [[비블로스]] 같은 도시들도 번성했다. 하지만 당시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로 통일되지 않은 별개의 관계를 유지했고,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등 많은 나라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도시들로부터 공물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페니키아 문자]]가 [[아람어]]로 전수되면서 [[아람 문자]]로 변화한다.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언어는 거의 비슷했지만 종교가 달랐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를 믿던 반면 페니키아인들은 [[바알]]과 타니트 등의 신을 숭배했다. 그러나 성경의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보듯 유대인들이 종종 페니키아의 종교 문화를 흡수할 때가 있었던 것처럼 페니키아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흔했다. 페니키아인들의 종교와 이스라엘인들의 종교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가령 제사의 규례를 소개한 [[레위기]]에 따르면 해마다 속죄의 날에 두 마리의 숫염소가 제물로 바쳐지는데 한 마리는 제단 위에서 야훼에게 바쳐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사셀 Azazel'을 위해 황무지로 끌려가 벼랑 끝에 떨어져 죽게 된다. ‘떠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아잘’과 ‘염소’라는 뜻의 ‘에즈’가 결합된 단어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그것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다시 보내졌다는 측면에서 ‘악마’, ‘사막 귀신’ 또는 ‘사탄’을 언급한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속죄일 의식을 위해 두 마리의 염소가 선택되고, 그중에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내보내는데 그것이 바로 ‘아사셀 염소’이다. (레 16:8, 10) 상징적으로 백성의 죄를 전가시킨 산 염소를 광야로 내보냄으로써 더 이상 백성의 죄가 남아 있지 않고 모든 죄악이 제거되었음을 확인시키는 일종의 속죄(贖罪)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첫 번째 해석을 좇아 아사셀 염소는, 인류의 모든 죄악을 홀로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밖 갈보리 십자가 제단으로 나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표상이요 그림자로 본다(사 53:6, 11-12; 롬 3:24-26). 아사셀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위기에 한 번 등장할 뿐 그것이 무엇 혹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말해주는 단서가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랍비들은 아사셀을 광야에 사는 일종의 악귀나 악령으로 묘사했다. 이는 해마다 두 염소를 각각 신과 악귀에게 바친 [[우가리트]]의 종교 의식과 유사하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들어서고 [[그리스인]]들이 유입되었으며, [[헬레니즘]]화가 진행되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고대 로마]]에 정복당하고 이 지역은 로마 제국 영토로 이어진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고대 로마 시대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 일대가 전부 동일한 정부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니키아인들의 유대교 개종이 더 가속화되었다.[* 여기에는 카르타고가 멸망하면 페니키아 상인들의 입지가 크게 흔들린 점도 작용했지만, 페네키아인들의 주 거래처가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인 점도 있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출신 개종자들을 어떻게 유대교 사회에 흡수해야 하는가 관련한 논란이 끊이지가 않았고, 오늘날 비교종교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유대교 사회 내 이러한 갈등이 오늘날 초기 기독교의 보급 및 발전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서기 3세기 이후 로마 제국 동부에서 기독교가 점점 유행하기 시작하고 313년 밀라노 칙령 및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 이후 바알 숭배 신앙은 페니키아에서 몰락하고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되었다.[* 유대교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 탄압을 받아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서기 3세기 무렵부터 고대 [[베이루트|베리투스]]는 로마 제국의 법학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전통적인 대학 역할을 해왔던 아테네, 로도스, 밀레투스, 에페소스 등등이 몰락하고 3~6세기 기준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시리아 근교의 베리투스가 법학 대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베리투스 법학교는 주로 그리스어가 사용되던 동로마 제국 내 학교 중에서도 라틴어 법전 연구가 특히 활발한 학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절 말기에 퍼진 역병으로 동로마 제국 전반에 학문 지원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베리투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후 동로마 제국 전반에 걸쳐 학문 지원이 큰 타격을 받았고, 연이어 반 세기 뒤쯤에는 페르시아 및 신흥 이슬람 세력과의 계속 싸우게 되면서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해져, 제국 내 관료 및 학자들 사이에서는 주변 기층 사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습득하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배워야만 했던 것에 가까웠던 라틴어를 점점 놓게 되었다.] 지진과 해일로 베리투스 시가 파괴되고 이를 제대로 복구하지 못하였다. 7세기 아랍 무슬림들이 레바논 일대를 정복하던 당시 베리투스는 일개 어촌으로 전락한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