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닌주의 (문단 편집) === 협동조합론 === 『협동조합에 관하여』(О кооперации)는 1923년 [[신경제정책]]이 진행되던 시기 레닌에 의해 쓰여졌다. 신경제정책은 전시 공산주의에서의 왜곡을 시정하고 또 농민에게 일정한 양보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경제는 국유화된 사회주의 공업 부문, 국가자본주의 부문, 소생산자(소부르주아) 부문, 사적 자본주의 부문으로 구성됐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에 대해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부문이 농민의 획득을 놓고 투쟁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이 농민을 포함한 소생산자 집단을 점유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사적 자본주의 부문이 농민과 연합해 자본주의를 복고할 것인가가 각축하고 있었다. 즉, ‘누가 누구를’이라는 것이 당시의 관건적 요소였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사회주의 공업 부문을 서서히 회복해 나가는 것을 기초로 사적 자본주의 부문을 제한하고 서서히 배제해 나가는 정책을 폈다. 이와 더불어 레닌은 볼셰비키 내 여러 분파의 정치적 도전을 받았다. 당시 레닌의 정책을 비판하던 분파는 크게 ‘민주집중파’, ‘우익반대파’라는 두 분파로 나눠져 있었다. 민주집중파의 비판은 주로 러시아 공산당의 구조 문제였지만, 정치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과거 좌익공산주의파의 주장을 계승했다. 이에 따라 민주집중파는 신경제정책의 폐지, 농업희생에 바탕한 초공업화(超工業化)를 주장하고 있었다. 반면, 우익반대파는 신경제정책의 확대와 농업 일체에 자본주의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하길 바라고 있었다. 레닌은 두 분파의 핵심 일원인 티모페이 사프로노프, 발레리안 오볼렌스키, [[니콜라이 부하린]]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 조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어떠한 과정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 노력이 『협동조합에 관하여』이다. 레닌은 혁명에서 중농과 동맹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경제 조직 과정에서도 중농과 동맹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레닌은 부농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이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경제 조직 과정에 적대적이지 않으며, 두 계급 사이에는 계급 투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레닌의 이러한 생각은 1920년 8월 7일 코민테른 2차 대회 「농업문제에 관한 테제」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 농민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파괴적인 계급 투쟁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사회주의 조직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농업장비 수준이 열악한 빈농 입장에서는 볼셰비키에 의해 국유화가 된 토지에서 농업 노동자로서 기능하며, [[트랙터]]와 같은 농업장비를 숙달하고, 이를 무상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하여 국유 농지에서의 생산력을 증가시킨 다음 소농과 중농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당은 중농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으며, 몇 가지 세금 제도 및 농산물 회수제를 기초로 하여 국가기관과 생산 조직 사이의 괴리성을 소멸한다. 레닌은 공업화의 필수 요건으로, ‘농업 인구의 사회주의 조직화’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은 오로지 협동조합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물론, 이 과정은 노동계급이 국가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수단이 국유화 된 시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사실 모든 대량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 권력,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 소농 및 영세농과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의 농민에 대한 확실한 지도력 등 ― 이러한 것들이 협동조합으로부터, 오직 협동조합으로부터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과거에 협동조합을 장사치라 경멸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신경제정책하의 지금도 그렇게 경멸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니겠는가? 아직 이러한 것들은 완전한 사회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필요 충분한 모든 것이다. > — 블라디미르 레닌, 『협동조합에 관하여』(1923년 1월) 레닌은 사회주의 조직에서 군사 문제와 재정 문제는 중요하다고 했으며, 유럽 혁명의 지속적 지원 역시 여러 번 검토했으나, 사회주의 조직의 핵심은 농업생산조직과 노동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을 완화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완화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이 필수라는 것이다. 레닌주의에서 협동조합 개념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레닌이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협동조합과 다르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협동조합은 각 지분 규모와 관계가 없이 총회에서 권한이 동등하며, 세금 지원, 기타 사업 자금 지원 외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은 총회에서의 권한이 모두 갖고 이익금을 분배 차원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협동조합과 유사하지만, 국가가 사업 방향 및 이에 필요한 물자와 인프라를 전(全)사회적으로 지원한다는 점, 특히 직접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협동조합에 관하여』에서 레닌은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어떠한 정신적 형태의 보상이 아닌, 물질적 형태의 보상이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함을 논하고 있다.[* 스탈린은 인민을 쥐어짜다시피 해 공업화를 이뤘지만 대신 훌륭한 노동자에게는 인센티브를 빵빵하게 주는 방식을 활용했는데, 이후 인센티브 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화되면서 대다수의 소련 인민들은 턱없이 적은 월급만을 받는 신세가 된다. 결국 이는 암시장의 활성화로 이어져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는 협동조합 가입자에 대한 세금 혜택부터 국영은행에서의 대출 혜택 등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다. 동시에 국가 기관은 협동조합 지원을 꾸준히 하며, 협동조합 구성원이 외부 거래자와 접촉하여 무역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레닌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농민이 발전된 농업 체계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농민’이 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소생산자(수공업, 소공업 종사자)들은 협동조합화를 통한 사회주의 생산 관계로의 전환의 길을 걸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협동조합을 결성할 경우 세금 혜택과 각종 신용을 제공했다. 또한 전문집단으로 구성된 국가 기관에서 구체적 사업 전략을 피드백하고, 이에 따른 자금을 대폭적으로 지원한 동시에 타 공업과의 연계망을 제공하면서 소생산자 집단은 협동조합화를 통한 대공업으로의 변신의 길을 걸은 것이다. 수공업은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공업화가 시작되기 전에 인민에게 필요한 일용품의 생산을 주로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은 제1차 5개년 경제 개발 계획 때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전 분야에 소공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취업 인구의 57.1%였고 공업 총생산의 22.4%를 차지하였다. 협동조합화의 결과 1933년 1월 1일 수공업 협동조합은 14,811개로 증가하였고 그에 소속된 인원은 16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주의 계획 경제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신경제정책을 같이 주도한 부하린과의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그의 “농민들, 부자 되시오!”라는 말로 대표할 수 있는 것처럼, 부하린은 농촌에서 자본주의 생산 관계를 일정 유지하고자 했으며, 협동조합을 신용 협동조합으로 제한하길 바랐다. 그리고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최소화하려고 하였으며, 협동조합 사이의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했다. 부하린은 이에 따라 협동조합이 개별 기업의 성격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적극적인 전문집단의 피드백과, 전(全)사회적인 투자를 통해 협동조합의 규모를 팽창시켜 외국과의 무역에서 이점을 차지하고자 했던, 그리고 신용 협동조합만이 아닌, 생산, 소비, 인프라 구축 특화 협동조합까지 구상하려던 레닌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나중에 스탈린이 부하린을 숙청하는 명분이 되었다, 또 농업희생론에 바탕하여 초공업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민주집중파는 신경제정책의 즉각적인 폐지와 협동조합을 통한 점진적 국유화 방식이 아닌, 급진적인 국유화를 내세웠다. 레닌은 당시 좌익 공산주의파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민주집중파의 주장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마자 바로 숙청됐지만, 웃기게도 스탈린은 독재권력을 마련한 이후 이들의 주장대로 경제정책을 시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