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기온 (문단 편집) ===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 아루시오 전투 당시 이미 유구르타 전쟁으로 유능한 장군으로 명성 높았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또 다시 선출되어 군제개혁에 착수했다. 아루시오 전투가 남하하는 [[게르만족]]에게 패배한 것이었고 또한 게르만 족이 그 여세를 타고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이 확실하였으므로 마리우스로서는 군제개혁을 할 명분이 있었다.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에서 기존에 무장을 조달할 수 있었던 중산층에게서 징집하지 않고 시민권자 전원을 대상으로 모병하는 모병제로 전환했다. 다만 지원자들 대부분이 무산자 혹은 그에 준하는 빈곤층이라 자신들의 무장을 조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지원해야 했고, 따라서 기존의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의 구분은 없어졌다. 이후 로마 정규군은 대부분이 종전 프린키페스에서 이어지는 무장을 하였다. 마리우스는 4천에서 5천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기존의 군단의 총원을 6000명으로 규격화했다. 또한 군단을 편성하면 그에 맞먹는 수의 보조병(Auxiliarius)도 구성하였다. 제1대대 소속 160명으로 타 대대는 80명 백인대(Centuria; 켄투리아)로 구성되며, 6개 백인대가 모여서 만들어진 전술단위인 대대(Cohort; 코호트), 그리고 10개의 대대로 형성되는 전략단위인 군단(Legion; 레기온)이 중심이 되며, 보조병 및 기병은 동맹국의 파견병력으로 편성하게 되었다. [[백인대장]](Centurion)은 병사들과 같은 출신의 노련한 소대지휘관으로, 군단장의 참모이자 명목상 대대지휘관인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은 선출된 시민 중에서, 군단장인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는 노련한 정치가(전직 [[집정관]] 또는 전직 [[법무관]]급)가 맡았다.[* [[그리스]] 나 [[로마]] 쪽에선 [[정치가]]와 [[군인]]이 같은 테크를 밟는다. 이쪽 사상에선 [[참정권]]을 '''피를 흘린 대가'''라고 할 정도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기 전 로마에서도 전통적으로 집정관이 군대 최고 통수권자를 겸했다.] 군단의 중핵인 중장보병은 [[로리카]] 하마타 갑옷을 입고 [[필룸]] 투창(Pilum)과 [[스쿠툼]] 방패(Scutum), 히스파니아에서 도입된 근접전에서 사용하는 [[글라디우스]] 검(Gladius)으로 무장하였으며 기병, 투석병, 공성병은 보조병으로 편성되었다. 로마의 많은 장군 중 전술적으로 가장 유능했으며 군단을 가장 잘 활용한 인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를 들 수 있다. 스키피오는 로마 군단의 최대 장점인 유연한 상황 대처능력과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하여 능수능란한 지휘를 펼쳤고, 다수의 기병을 이용한 측면/후방 공격으로 전선의 보병대에 충격효과를 일으키는 데에 능했다. 다만 로마가 기병을 양성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어서 대개는 갈리아 또는 누미디아 기병을 용병이나 보조병으로 도입했는데, 이러한 기병활용은 로마군의 기본적 전술개념이 되었다. 이 전통은 1453년에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로마 군단은 그 유기적 체제(백인대 - 대대 - 군단으로 이어지는)를 이용하여, 다양한 전술적 국면에서 적절한 전투상황을 유도할 수 있었다. 중장보병과 맞먹는 수효의 보조병을 운용함으로써 이러한 능력은 극대화되었으며, 공성전이나 방어전에서도 우수한 공병대를 이용하여 많은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예비대(초기, 이후 기병대 또는 후방 보병대)를 체계적으로 운용함으로써 패배할 때도 참패를 당하는 일이 적었고 승리할 때에도 충분 이상으로 전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또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병사들에게 급료와 퇴역 후 퇴직금을 주지만 장비는 돈을 내게 했다. 군장이 일체화되기는 했지만 지급이 아닌 공동 구매. 그래서 로마 병사들은 투창 던기지를 매우 싫어했다. 왜냐하면 던진 투창 값이 월급에서 까이니까. 게다가 마리우스는 로마군이 던진 투창을 [[노획|적이 주워서 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룸|던져진 투창은 쉽게 부러지도록 설계했기 때문]]에 재활용하기도 더 힘들어졌다. 이후 원수정 시기와 전제정 시기를 거쳐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시기의 레기오에 대한 서술은 평화에 안주하며 사치와 안일에 빠진 나머지 게르만족 용병들을 대거 받아들인 탓에 자멸했다.....라고 적지 않은 대중교양 서적에서는 아직도 서술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사치와 향락 문제가 아니다. 로마의 인구는 늘어나고 영토는 커지다보니, 고대 농업 수준으로 부양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라 근본적인 모순이 불거짐이 진정한 원인이고, 그 당대엔 있다고도 생각지 않은 몇 가지 특정 시대의 특정 요소를 준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레기오의 무장과 전술 개념은 3세기 초반 들어 카라칼라의 레기오와 아욱실리움의 지원 자격 구분 철폐 및 기동부대(vexillatio) 편성 등으로 전환기를 맞으며[*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 자체가 로마군의 약체화와 퇴폐를 초래한 투로 말하는데 이것도 실상과 다르다. 군대 체제를 떠받쳐주는 체제 역량, 즉 경제력이 감퇴되어가고 인력도 줄어드는 판국에 이전 시기의 시대와 맞지 않는 전술과 편제를 고수하는 것은 제국 방어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전 세기에 내내 입증되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대대적인 편제 개편을 거친다. 5천 명 정도로 규모를 헤아리던 레기오는 1천 명 단위 부대로 세분되었으며, 레기오들 중 정예들은 정제(正帝)와 부제(副帝)를 직접 따라다니는 친위대인 코미타텐세스에 배속되었다. 즉 이전에는 백인대 - 대대 - 레기오에서 레기오의 규모가 여단급에서 연대급으로 줄어드는 대신 정제와 부제는 여러 레기오들 위의 상위 단위인 코미타텐세스[* 결국 종전 레기오급의 규모거나 혹은 그 두세 배 정도가 된다. 반란 억제가 주요 이유라서 이렇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 4황제들의 친위대 명칭은 사실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였지만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부분은 대부분 생략한다.]를 이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시대가 되면 코미타텐세스란 명칭은 편제 단위가 아니라 기동 야전군을 뜻하는 일종의 병종 용어 비슷하게 되며, 레기오 위에는 야전군 혹은 둑스 관할[* 리미타네이 병종은 종전 레기오와 같이 국경을 방어하는게 주임무였기에 분명 어떤 의미에선 종전 레기오와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수를 제대로 받는 우수한 자원들은 코미타텐세스로 많이 빠졌기에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이란 편제가 나타나게 된다. 물론 황제 직속 친위대인, 즉 종전 군단 단위 부대고 해체한 프라이토리아니를 대신한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는 스콜라이와 함께 여전히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 부대는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충격 이후로 건제가 붕괴해서 사라지기에 이 항목에선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이 편제는 이후 큰 변화없이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때까지도 이어지며, 레기오는 어떤 의미에선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부터 본격적인 활약의 장에서 퇴장하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준 셈이지만 적어도 연대급 편제로서는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7세기 이슬람 제국의 맹진 앞에서 큰 위기를 겪었다. 리미타네이로서 둑스 관할 편제 하에 있던 부대들은 이때 전원 궤멸했고 코미타텐세스로 야전군 편제로 있던 부대들은 남은 영토로 물러나 생존했지만, 레기오 편제 자체는 다른 이름으로 존재를 이어갔다. 2~3세기에 등장했던 기병 연대나 대대들은 이후의 편제 개편에서도 간단히 등장하고, 심지어 어떤 부대는 9세기 문헌에도 나오지만, 보병 연대나 대대들은 이 부분이 확실치가 않다. 7~8세기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의 이슬람 제국의 맹공 앞에서 종전의 야전군은 [[테마]] 단위로 변한다. 이때 테마 단위는 데카키아 - 켄타키아 - 드룽고스 - 테마로 편성되는데 이 시기부터 레기오란 말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즉 종전 레기오들이 테마로 명칭이 바뀌어 각 지역에 황실 영지를 받고 둔전병으로 배치된 것이다. 다만 유명한 켄투리오, 즉 백인대장의 칭호와 백인대 편제만은 아예 명칭도 그닥 바뀌지 않은채 최소한 9세기까지는 계승되었다. 백인대는 켄투리오가 아니라 켄타키아로 불렸고 백인대장은 켄투리오가 아닌 에카톤다키스로 불렸다지만, 이들은 3세기부터도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그 명칭으로 통하고 있었다. 로마 레기오들의 직계 후예인 테마 부대들은 이슬람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 게르만족의 맹공도 버텨내며 생존했지만, 11세기 각기 디라키움 전투와 만지케르트 전투를 거치며 노르만족과 투르크족의 맹공에 최종적으로 궤멸했다. 다른 자세한 내용들은 [[로마군]]의 후기 로마군 부분 및 [[동로마 제국]]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