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럭비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풋볼 파생 종목)] 럭비 풋볼은 [[잉글랜드]] [[워릭셔]] 주 럭비 지역의 유명 [[퍼블릭 스쿨|사립 학교]] '럭비 스쿨(Rugby School)'에서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학교의 이름을 따서 럭비라고 부르게 되었다[* 럭비 풋볼이라는 이름도 "럭비식 풋볼"이라는 뜻.]. 1823년 럭비 스쿨에서 [[풋볼]][* 여기서 풋볼은 현재 즐기고 있는 그 축구(Association Football)가 아니다.] 경기 중 [[윌리엄 웹 엘리스]]라는 소년이 당시에 공을 잡는 게 허용되던 풋볼에서 손과 발을 번갈아가며 공을 드리블해야 했던 당시의 규칙을 어기고 공을 안은 채 상대 팀 골 라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어 현재 이것을 럭비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야구의 [[야구/기원|Doubleday 기원설]]과 비슷하다. 다만 럭비는 이쪽이 사실상 정설 취급받는 반면, 더블데이 기원설은 더블데이 후손조차 "엉터리 명예를 받고 싶지 않으니 당장 시정해라."라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 사무국을 디스하는 판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더블데이 야구 창작설은 더블데이가 야구 규칙을 만들었다는 1860년보다 3년이나 빠른 1857년에 닥 애덤스가 만든 야구 규칙이 발견되면서 거짓으로 밝혀졌다.'''] '공을 손으로 잡고 앞으로 질주하면서 골 라인을 돌파한다'는 럭비의 본질이 이 소년의 돌발 행동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기념해 [[럭비 월드컵]] 우승 트로피에 이 소년의 이름을 붙여 '''[[럭비 월드컵#s-2|웹 엘리스 컵]]'''이라고 명명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ugby School.jpg|width=100%]]}}} || || '''럭비 스쿨(Rugby School)''' || 공을 손으로 들고 달리는 것은 1830년대 럭비 스쿨에서 흔한 일이 되었고, 럭비 풋볼은 1850년대와 1860년대에 영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특히, '''1843년'''에는 'Guy's Hospital' 직원들에 의해 창단된 [[https://en.wikipedia.org/wiki/Guy%27s,_Kings_and_St_Thomas%27_Rugby_Football_Club| '''Guy's, Kings and St Thomas' RFC''']]라는 최초의 럭비 풋볼 클럽이 결성되었고[* 어느 풋볼 코드를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클럽팀이다.], '''1845년'''에는 럭비 스쿨 학생 총회에서 3명의 학생들로부터 '''럭비 풋볼'''이라고 불리는 풋볼 규칙을 제정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럭비가 [[축구]]보다 먼저 규칙이 제정되어졌다'''.[[https://sqaf.club/which-came-first-football-or-rugby/|(Rugby came first)]] 19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선 오로지 [[퍼블릭 스쿨|사립 학교]]에서 발전되고 분명한 규칙을 갖추게 된 풋볼 유형들만이 사회적 인정을 받았고, 그 중에서 자기 학교 밖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럭비 풋볼'''뿐이었다. 말버러와 [[첼튼엄]]의 규칙들도 럭비 경기에 긴밀히 의존하고 있었다. 더불어 현재까지도 대다수의 영국 사립 학교들은 럭비를 주요 스포츠로 하고 있다. 1843년에 결성된 Guy's, Kings and St Thomas' RFC를 포함해, '''1854년'''에 창단된 [[https://en.wikipedia.org/wiki/Dublin_University_Football_Club|'''Dublin University Football Club''']]도 럭비 스쿨 규칙을 준용했다. 이후 '''1863년''' 축구와 럭비 두 종목의 운명을 완전히 가르게 될 회의가 [[런던]]의 프리메이슨 테이번 선술집에서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축구협회(잉글랜드)|축구협회]](FA)의 조직을 위해 17명의 관계자가 모여 경기 규칙 제정을 목표로 진행됐다. 이 회의에서 경기 중 '공을 들고 뛰어도 되느냐'라는 ''''핸들링''''의 문제뿐 아니라 , '상대편 선수가 자유롭게 공을 빼앗기 위해 넘어뜨리거나, 붙잡거나, 저지하거나, 상대방의 정강이를 차서 넘어뜨리는 '''해킹(Hacking)'''을 해도 되느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고, 관계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중에 특히나 논쟁이 발생한 두 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IX.''' 만약 선수가 정당하게 공을 잡았거나, 첫 번째 바운드에 공을 잡았으면 선수는 상대편의 골문을 향해 공을 가지고 뛸 수 있다. 그러나 정당하게 공을 잡았을 경우에 만약 그 선수에게 수비가 있을 경우에는 달릴 수 없다. >'''X.''' 어느 선수든지 공을 가지고 상대편의 골문을 향해 달려간다면, 상대편의 어떤 선수라도 저지하고, 붙잡고, 발을 걸거나 정강이를 차거나 공을 빼앗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붙잡는 것과 정강이를 차는 행위를 동시에 해선 안 된다. 결국 이 회의에서 [[축구협회(잉글랜드)|축구협회]]는 손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해킹'을 규정에서 삭제하면서 ''''[[축구]]''''와 ''''럭비'''' 사이의 분열을 공식화하며 창설하게 되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럭비 스쿨 졸업생들이 창설한 [[https://en.wikipedia.org/wiki/Blackheath_F.C.|블랙히스 럭비 풋볼 클럽(Blackheath RFC)]] 대표 프란시스 캠벨(F.W.Campbell)은 '''"해킹은 풋볼의 필수 요소"'''라며 풋볼이 완전하게 ''''여성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상대방을 차는 것을 금지한다면 풋볼의 본질이 파괴될 것이라는 입장을 흔들림없이 고수했다.[* 캠벨은 해킹에 대한 반대는 고등교육기관에서 양성하는 '시민의 용기와 극기'라는 이상을 지닌 [[젠틀맨]]의 윤리에 대한 반대이며,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자들이 이러한 반대를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에베니저 콥 몰리(Ebenezer Cobb Morley)와 축구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킬번의 노 네임스 클럽(No Names Club)의 펨버(A.Pember)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사립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즉, 캠벨은 "좋은 학교 교육을 받은 선수들도 해킹에 반대한다"라는 펨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 그는 신체적 위험으로 뛰어드는 용기를 잉글랜드의 [[젠틀맨]] 덕목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믿었다. 당시에는 해킹이 [[젠틀맨|신사도]]와 관련되어 있었기에 훨씬 민감한 이슈였다. 이에 따라 캠벨은 해킹에 반대하는 규칙 제정에 반발하여 축구협회를 탈퇴하였고, 다른 럭비 풋볼 클럽들도 이 선례를 따라 축구협회(The FA)에 가입하지 않게 되었다. '''1870년''' 12월 4일, 리치몬드의 에드윈 애쉬(Edwin Ash)와 블랙히스의 벤자민 번스(Benjamin Burns)는 타임즈에 "럭비 풋볼 클럽들마다 조금씩 다른 규칙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럭비 형태의 풋볼 경기를 하는 사람들은 연습 코드를 만들기 위해 만나야 한다"라고 제안하는 글을 실었고, 마침내 '''1871년 1월 26일''', 21개 클럽 대표들이 참석한 런던의 Pall Mall 레스토랑에서 열린 회의에서 럭비 풋볼 클럽들은 '''[[럭비 풋볼 유니언]]'''을 결성하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ngland Rugby Team 1871.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cotland Rugby Team 1871.jpg|width=100%]]}}} || ||<-2> 1871년 [[잉글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잉글랜드]](왼쪽)와 [[스코틀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오른쪽)의 세계 최초 국제 럭비 경기 당시 모습 || 같은 해 '''1871년 3월 27일'''에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래이번 플레이스(Raeburn Place)에서 세계 최초로 [[잉글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 간의 국제 경기[* 당시 국제 경기 측면에서는 럭비가 앞섰고, 컵 대회 측면에서는 축구가 앞섰다.]가 치러졌고, 그 후로 다음 해인 '''1872년'''에는 영국 명문 대학교인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럭비팀 간에 최초의 ''''대학 대항전([[https://www.youtube.com/watch?v=DYWGjMSA0Dg|The Varsity Match]])'''' 경기가 치러졌으며, 이 경기를 시작으로 현재까지도 역사와 전통을 이어서 매년 정기적으로 [[트위크넘 스타디움]]에서 '바시티 매치'를 해오고 있다. 그리고 또한, [[영국 해군|영국 왕립 해군]]과 [[영국 육군]] 간의 럭비 경기도 매년 열리고 있는데, 이 경기는 본래 1878년 2월 13일 런던 Oval에서 영국 육군 장교들과 영국 해군 장교들 간 치러진 최초의 럭비 경기를 시작으로 1907년부터 영국 [[영국 육군|육군]] VS [[영국 해군|해군]] 경기인 [[https://www.youtube.com/watch?v=Qtz59bwA26Q&t=13s|British Army Vs Royal Navy]]는 연례 경기가 되어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 경기 역시 트위크넘 스타디움에서 열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he Varsity Match in 1872.jpg|width=100%]]}}} || || [[옥스퍼드 대학교|{{{#000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000 케임브리지대}}}]]의 '''[[대학교 정기전#s-2|{{{#000 바시티 매치}}}]]''' 1872 || [[타임스]]에 따르면, 럭비 경기는 1880년까지도 축구(Association Football)보다 줄잡아 두 배나 많은 선수들을 끌어모았다. 그것도 잉글랜드는 남부의 [[젠틀맨]] 팀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북부의 노동자 클럽에서도 그러했다. 가령 [[맨체스터]]와 [[리버풀]]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럭비만 했었다. 1866년에도 FA 회원은 겨우 10개 클럽에 불과했다. 문제는 20세기에 돌입하면서 두 종목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핵심은 [[아마추어#s-3|'''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적용이었다. [[축구협회(잉글랜드)|FA]]를 중심으로 축구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클럽팀에서 노동자 선수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프로페셔널#s-2|'''프로페셔널리즘''']]을 허용했다. 반면 [[럭비 풋볼 유니언]]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아마추어리즘을 지키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선수가 럭비 경기와 훈련을 위해 희생한 시간만큼 임금으로 보상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결국 1895년 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갈등으로 럭비 풋볼은 크나큰 분단을 겪게 되었다. 바로 '근무 손실 시간 임금(Broken time payment)' 지급 문제로 아마추어리즘을 엄격히 고수하던 럭비 풋볼 유니언에 반발하여 상대적으로 노동자 계층이 많았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22개의 럭비 클럽들이 럭비 풋볼 유니언을 탈퇴하고 '''노던 럭비 풋볼 유니언(Northern Rugby Football Union)'''을 결성한 것이다. 이후 1922년 노던 럭비 풋볼 유니언은 다름아닌 '''[[럭비 리그|럭비 풋볼 리그]](Rugby Football League)'''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한편, 그간 럭비 풋볼이라고 불렸던 현재의 '''럭비 유니언(Rugby Union)'''은 [[럭비 리그]]와 차별성을 부여하기 위해 1895년에 이르러서야 사용하기 시작한 명칭이다. 그 이후로도 럭비 유니언은 '''1995년'''까지 엄격히 아마추어리즘을 고수[* 1900년도 초반에 잉글랜드 럭비 풋볼 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럭비인으로는 최초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던 조지 힐 경(Sir George Rowland Hill)도 럭비의 아마추어리즘을 외쳤다. 그는 "나는 프로페셔널리즘에 굴복하느니, 럭비 협회 조직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며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럭비 협회만은 그들이 다른 스포츠에 결핍돼 있는 순결함의 상징인 아마추어리즘을 유지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100년 가까이 아마추어 스포츠로 남았다.]했지만, 1995년 [[월드 럭비|국제 럭비 풋볼 연맹]](IRFB)은 공식적으로 럭비 유니언은 프로화를 선언[* 심지어 1987년에 최초의 [[럭비 월드컵]]이 열릴 때에도 [[럭비 풋볼 유니언]]은 세계 대회 개최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IRFB가 공식적으로 럭비 유니언의 프로화를 선포했을 때에도 '''잉글랜드만이 완강하게 반대했었다'''.]하며, 프로페셔널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주로 럭비 유니언이 인기가 많고 보편화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럭비 유니언이 인기 있는 나라들은 럭비 리그도 활성화되어 있다. 그리고 럭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럭비 유니언을 지칭하고 럭비 리그는 럭비 리그나 리그라고 부른다. 하지만, 두 코드의 스포츠는 전세계 대부분에서 간단히 "'''럭비'''"로 알려져 있다. 주로 럭비 유니언이 인기가 많고 보편화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럭비 유니언이 인기 있는 나라들은 럭비 리그도 활성화되어 있다. 그리고 럭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럭비 유니언을 지칭하고, 럭비 리그는 럭비 리그라고 명확히 말하거나 간단히 리그라고 부른다. 두 코드와 파생 종목을 아울러 럭비 풋볼, 간단히 '''럭비'''라고 총칭한다. 럭비 풋볼이 초기 풋볼의 룰 변경을 시발점으로 탄생했고, 이 풋볼 원형과 럭비가 또 여러가지 스포츠로 변형된 걸로도 유명하다. 풋볼 원형이 아일랜드에 들어가 룰이 바뀌어 정착된 것이 아일랜드의 최고 인기 스포츠인 [[게일릭 풋볼]][* 게일릭 풋볼은 풋볼 원형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이고, 호주에 들어가 이 룰이 다시 변형된 것이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게일릭 풋볼과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은 공통점이 많아 시즌 후 인터내셔널 룰로 국가대표팀끼리 친선 경기를 갖는다.], 이른바 오지 풋볼(Aussie Football)이다. 그리고 럭비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과 캐나다에서 각각 변형된 것이 [[미식축구]]와 [[캐나디안 풋볼 리그|캐나디안 풋볼]][* 이 두 종목의 필드 모양이 고기를 굽는 석쇠 같다고 하여 두 종목을 석쇠를 뜻하는 영단어 Gridiron(그리드아이언)을 갖다붙여 Gridiron Football, 혹은 더 간단히 그냥 Gridiron이라고도 한다.], 19세기 스코틀랜드에서 물 속에서 하는 럭비라고 하여 워터 럭비(Water Rugby)라고까지 불렸던 현재의 [[수구]][* 물론 현재의 수구는 럭비라기보단 물 속에서 하는 [[핸드볼]]에 가깝게 변했다.] 등 수많은 파생 종목을 낳았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 '''[[국가(노래)|국가(國家)]] 제창''' || [[파일:Wales Rugby 1905.jpg|width=100%]] || || '''1905년 뉴질랜드를 이긴 웨일스 럭비 선수단''' || '''스포츠 국가대표팀이 국제 경기 전에 국가(國家)를 제창하는 것은 바로 럭비 경기에서 유래된 문화이다.''' 1905년 [[뉴질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이 웨일스를 방문하며 럭비 경기를 치렀는데, [[웨일스 럭비 유니언]]의 선수이자, 선수 선발 위원이었던 톰 윌리엄스가 뉴질랜드 [[마오리 하카]]에 대응하여 웨일스 국가를 부르자고 제안하였고, 그리하여 관중들도 선수들에 호응하여 웨일스의 국가인 "[[Hen Wlad Fy Nhadau]]"를 함께 제창하였다. 이것이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경기 전 국가가 제창된 날이다. 그리고 그 뒤로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스포츠에서도 경기 전에 국가를 제창하기 시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