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일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 2억 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 영토까지 할양해야 했는데 그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했다. [[부동항]]으로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러시아는 [[독일 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을 반환하도록 압박했다.[* 이 때 독일 제국은 지구 반대 편에 있는 칭다오와 비스마르크 제도에 식민지와 거점 기지가 있을 정도로 한참 전성기였을 때라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이를 주시하던 조선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와 외교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청일전쟁으로 경복궁을 점령했던 일본이 세운 친일내각을 실각시키고 친러파가 대두한다. 이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조선 조정에 다시 친일 내각을 집권시킨다. 1896년 2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아관파천]]으로 일본이 세운 친일내각을 몰아내고 다시 친러내각을 수립하자 일본은 러시아와 줄곧 협상을 벌였다.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주조선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 사이에서 체결. 일명 경성의정서 혹은 베베르 소촌 각서. 고종의 환궁과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고 조선 주둔 러시아와 일본군을 800명으로 제한했다.]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 [[이홍장]]-로바노프 협정. 러시아, 청나라, 조선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서로 협력하여 요격한다는 협정. 이를 위해서 청나라는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을 통과하는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에 넘겨줬다. 이때 이홍장은 50만 루블의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3일 뒤 야마가타는 39도선에서 한국을 분할하자고 제안했으나 로바노프외상는 반대하였고, 대신 비밀조항에서 소요 시 양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고 충돌을 막기 위해 중립지대를 설정할 수 있다는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를 채택하였다.[* 모스크바 의정서 혹은 로바노프 산현 의정서로도 불리며 이는 러시아와 일본 중 어느 한 국가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증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상호 견제 조치였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0&levelId=tg_004_0320&ganada=&pageUnit=10|#]] ] 이 사이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하였고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에게서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과 [[다롄]]을 조차 받아 이곳을 [[러시아령 다롄|포트 아르투르]]로 칭하며 해군 기지 및 요새를 건설한다.[* 이에 영국은 2개월 뒤, 견제 목적으로 뤼순 반대편에 있는 산둥 반도의 [[웨이하이]]를 조차받는다.] 이후 한반도 방면에 자원을 투입할 여유가 사라진 러시아가 일본에게 한발 양보하여 성립한 것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https://ko.wikipedia.org/wiki/니시-로젠_협정|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1897년 12월 창설 예정이었던 한러은행이 일본을 지지하는 독립협회의 반대로 다음해 3월로 연기된 것이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는 150,000명의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 및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졌고, 특히 만주에서 중국과 무역거래를 원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과 [[대영제국|영국]]은 '러시아의 아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한다'고 봤으며,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과 여론을 견지하게 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이 1920년대 워싱턴 회의 체제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는 일시 만주 철군을 발표했으나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망명하고 조선 정부에 친러내각이 집권하는 등 러시아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철회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 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km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말기에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패색이 현저해진 상태였다.]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 전쟁 이전에 이미 러시아군은 탄환이 무려 2800만 발이나 모자랐다.[[http://cafe.daum.net/shogun/Mq7W/148|#]]],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 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을 수리하기조차 어려웠다. [[니콜라이 2세]]가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일본에 내주면 만주와 연해주가 위협받는다는 로젠의 의견에 따라 전쟁 시 철군 계획을 철회하고, 1903년 압록강 국경지대의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일본과 영국의 반대로 철폐한다. 1903년 8월 12일 주러공사 쿠리노 신이치로(粟野愼一郞)가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일본 세력하에 둘 것을 요구하고,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권한을 철도경영에 한정시키려고 하였다. 10월 3일 대안에서 러시아정부는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일본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한반도와 만주를 분할하고 남북 각 50km의 중립지대를 설정할 것을 제의하였고 이러한 러·일간의 교섭은 1904년초까지 계속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0,000명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0,000명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0,000명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했지만 7,000km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반면 일본은 무엇보다 전장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1904년 1월 21일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군대를 상륙하고 이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요충지를 차지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였다. 일본은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 라는 이념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러시아가 전쟁준비가 안 된 것을 간파한 일본은 1904년 2월에 전쟁을 시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