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일전쟁 (문단 편집) == 여담 == *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을 배경으로 한 '짜르의 마지막 함대'라는 역사 교양서를 보면, 발트 [[함대]] 사령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북해에서 동북아까지 오는 긴 여정 중에 함대 전투함들의 바닥에 따개비가 붙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분을 염려하는 장면이 있다. [[군함]]에서는 따개비가 들러붙으면 기동력을 깎아먹기에 큰 문제가 생긴다. * 일본 정부는 [[아카시 모토지로]]를 통해 전쟁기간 러시아 안팎의 반체제주의자들을 접촉하고 거금을 지원하였다. 주러 일본공사관들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스톡홀룸으로 거처를 옮기고 '러시아 내란 공작' 을 실행해 거물 혁명가, 좌익 운동가, 불평분자 등과 광범위하게 접촉했고 그들에게 아낌없이 거금을 뿌렸다. 가폰 러시아 정교회 신부, [[블라디미르 레닌]], 아나키스트인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마르크주의자인 [[https://ko.wikipedia.org/wiki/%EA%B2%8C%EC%98%A4%EB%A5%B4%EA%B8%B0_%ED%94%8C%EB%A0%88%ED%95%98%EB%85%B8%ED%94%84|게오르기 플레하노프]], 폴란드 민족주의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피우수트스키]], 핀란드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소설가 [[막심 고리키]], 그루지아·라트비아·벨라루시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결과 1905년 1월 1일에 뤼순이 함락되자 이로부터 20일이 지난 1월 22일 일요일에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광장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http://www.startup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620|#]] * 일본에서는 1899년에 태어난 [[쿠단]]이 5년 뒤에 러일전쟁이 벌어질거라는 예언을 남기고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이 일화는 10년 뒤(1909년)에야 신문기사로 나온 이야기라 신빙성은 알 수 없다. 당시 예언을 남기고 죽은 쿠단의 시체는 박제시킨 뒤, 나가사키에 있는 야히로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박물관의 폐관으로 행방이 묘연한 상태. * 유년기의 [[김홍일(군인)|김홍일]] 장군이 열 살도 되기 전 러일전쟁이 벌어졌는데, 고향인 [[용천군]]이 압록강 전투에 휘말리는 바람에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당시 러시아 군인들은 그릇뿐만 아니라 [[요강]]까지 징발해다 음식을 담아 먹어 일부 마을 사람들이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고 한다. 음식이나 집을 징발해서 민폐를 끼친 건 기본이다. 당장 김홍일의 집부터가 러시아군 사령부로 쓰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은 어린 아이들이 곁에서 자신들을 대상으로 [[석전]]을 던지면 화를 내는 대신 곁에서 구경하거나 알사탕을 주는 등 관대한 면도 있어 아이들과 친했다. 특히 러시아 기병대는 아이들이 던진 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날아가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말을 타고 쫓아가서 돌을 도로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곤 했다고. 반면 일본 군인들은 러시아군보다도 온갖 것들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인부들을 무보수로 부려대어 민심이 영 안 좋았다. 거기다 석전을 하는 아이들에게 태형을 때리고 부모까지 잡아다 갈궈댔다고 전한다. 다만 의외로 러시아군과 일본군 모두 부녀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6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러시아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번역하여 출판한 책인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에 의하면, 함경도 포수들이 러시아군에게 "일본군이 우리 부녀자들한테 난폭하고 무례한 짓을 저질러 분노하고 있으니, 러시아군과 협력하겠다."라는 연락을 보냈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문에 부녀자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김홍일 장군이 살던 마을 한정이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치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라 수습 못 할 일을 벌이면 곤란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민폐를 끼쳤다가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일본 편을 들어버리면 만주의 지배권을 빼앗기기 딱 좋은 상황이라 최소한의 군기는 엄정하게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민심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 건 경쟁자 러시아가 정리되고 한반도를 독점 장악한 [[을사조약]] 이후부터다. * [[경상남도]] [[거제시]]의 취도라는 작은 섬 근처에서 일본제국 해군이 함포 표적 사격 연습을 하고 취도에는 러일전쟁 승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기습 침공을 겪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선전포고]] 의무를 강력히 주장하여 국제법으로 성문화했다.[[https://www.google.co.kr/amp/s/www.donga.com/news/amp/all/20211011/109654714/1|#]] 하지만 일본의 기습 침공은 이후로도 여전히 이어졌다. * 러시아를 따라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몬테네그로 공국]]은 실제로는 러일전쟁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이후 몬테네그로 공국은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에 합병되었고]] 2006년 독립 때까지 전쟁 중이었다. 2001년 일본을 방문한 몬테네그로의 축구선수가 종전을 명시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2006년에 공식적으로 합의했다. 실질적으로는 2001년과 2006년에 양국의 우호관계 증진을 위하여 벌어진 명목적인 퍼포먼스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