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량스이 (문단 편집) === 초기이력 === 1869년 [[광둥성|광동성]] 삼수에서 태어났다. 21세에 거인이 되었으며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북양서국 총판으로 벼슬길에 올라 우전부 좌참의, 한림원편수의 벼슬을 지냈으며 후일 중화민국 1대 국무총리가 되는 [[탕사오이]]를 따라 [[인도 제국]]에 파견되어 중영장조약을 체결하였다. 1907년 철로 총국장이 되었으며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여 [[위안스카이]]가 총리대신에 임명되자 그의 지시를 받고 탕사오이와 함께 청황실 퇴위 운동을 벌였고 [[자오빙쥔]], [[후웨이더]] 등과 함께 융유황후에게 [[루이 16세]]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 [[선통제]]를 퇴위시켜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에 청 황실은 량스이, 자오빙쥔, 후웨이더에게 위안스카이에게 잘 말해 청 황실의 목숨만은 붙여줄 것을 부탁했고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협상, 임시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량스이는 우전부장을 거쳐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1912년 3월 총통 비서장이 되었다. 1912년 5월 교통은행 사장이 되었으며 1912년 8월, 위안스카이의 초청을 받은 쑨원이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자 위안스카이의 지시로 그를 영접하며 회담에 참여했다. 1913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이때 6개 당적을 동시 보유했는데 당시 중화민국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1913년 5월 재정부차장 서리가 되었으며 위안스카이의 명으로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들끓고 있는 국민당에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계축전쟁]]이 진압되고 1913년 공민당을 조직해 위안스카이의 정식 대총통 당선을 이끌어 냈으며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단행된 이후 1914년 3월 10일 약법회의에 참여, 세무처 독판, 참정원 참정에 임명되었다. 북양군벌의 재정파 교통계와 광동계의 수장으로 문치파 안휘계의 수장 양사기와 대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