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랴오양시 (문단 편집) == 역사 == 랴오양 일대는 머나먼 옛날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홍산 문화]]의 동쪽 끝이었고 [[비파형 동검]]이 다수 출토되었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전국시대]]에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였으며, [[진(영성)|진나라]]와 [[전한]] 대에는 양평현(襄平縣)이라 불리며 [[요동군]]의 치소가 되었다. 당시 양평현은 현재 랴오양 시가지의 서북쪽에 있었다. [[후한]] 대에 [[현도군]](玄菟郡)이 고구려의 압박에 후퇴하며 [[무순]]으로 왔는데, 요동군의 북부 일대가 현도에 할당되어 양평현이 요동군의 최북단이 되었다. 당시 현도에 할당된 현 중 랴오양현(遼陽縣)이 있는데 양평현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 [[선양시]] 소속의 랴오중시 일대이므로 서로 다르다. 이후 [[삼국시대]] 초기에 [[요동 반도]]는 [[요동 공손씨 정권|공손씨]]의 지배를 받는데, 양평현은 그 수도였다. [[공손강]]은 [[원소(삼국지)|원소]] 잔당을 [[조조]]에게 바치며 그에 귀부하였으나 그의 아들 [[공손연]]은 칭제하다가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238년에 공손 정권은 멸망하였다. 양평성 포위전 당시 [[고구려]]가 위를 도왔고 이후 서안평을 점령했다가 242년에 [[관구검]]에게 대패했었다. [[조위]], [[서진]], [[5호 16국]]의 [[전연]],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 [[후연]]을 거친 후 요동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되었다. 고구려는 양평현에 [[요동성]](遼東城)을 세워 중시 여겼다. [[수나라]] [[양제(수)|양제]]는 613년에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지만 645년, [[당나라]]의 [[태종(당)|당태종]]은 함락에 성공한다. 이후 고구려가 수복하였으나 결국 670년경 당나라 영토가 되었다. 676년에 [[나당전쟁]]으로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폐지되는데 [[발해]]가 요동을 차지하면서 수복한 것으로 보인다. 919년에 [[거란]]의 [[태조(요)|야율아보기]]에게 리모델링 되었고 928년부터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가 설치되어 현재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요나라]], [[금나라]] 때에 랴오양은 동경으로 불렸다. 한편, 금나라의 황자로서 [[동경]]에 주둔하던 완안옹은 [[채석기 전투]]에서 대패한 [[해릉왕]]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그가 암살되자 [[금세종]]으로 즉위하였다. 백탑은 아마 그 기념으로 지어진 듯 하다. [[원나라]]는 랴오양 행중서성(遼陽行中書省)을 두었고, [[명나라]]는 1370년경에 랴오양에 성을 쌓고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1621년에 랴오양은 [[후금]]에게 함락되었고 1622년에 동경성이 축조되었다. 하지만 1625년에 [[선양시]]로 천도하며 동경성은 해체되어 성경성 건설에 쓰였다. [[청나라]] [[순치제]] 대에 펑톈부(奉天府)가 설치되었다. 20세기 들어서 랴오양은 [[러일전쟁]]의 전장이 되었다. (1904년 8-9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