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트비아/외교 (문단 편집) === [[파일:독일 국기.svg|height=16]] [[독일]]과의 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독일-라트비아 관계)] 중세 독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지금의 라트비아를 지배했던 이래 독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 [[독일/문화|독일문화]]가 라트비아 문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트갈레]]는 한때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소속이 되기도 한 적이 있지만, 라트비아인들은 19세기 말까지 자신의 조국에서 8%도 채 안 되는 발트독일인들의 밑에서 [[농노]]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 > 발전을 거듭했던 [[리가]]에서 라트비아인들이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발트지역에 정착해 살던 발트독일인이 아니면 제약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트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특혜 또한 아주 많아서. 러시아인들이 라트비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때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도 발트독일인들은 라트비아인들과 차별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면 살았다. > > 인접한 리투아니아에는 로마 카톨릭이 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독일에서 기원한 루터교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정행사가 전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라트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 신심이 깊은 민족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 >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에는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도시나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반면, 라트비아는 (리가를 빼고) 도시나 마을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라트비아에서 교회란 그 '독일 지주 나으리님'들의 종교였으므로 농노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교회를 지을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의 도시형태는 많이 변화하고 새로이 많이 지어지고 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런 현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민속연구상 기록에 보면 그런 현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 >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 '라트비아 사람들도 고등교육을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던 만큼 교육의 기회도 독일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20세기까지 라트비아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없어 농민들이 공부를 위해 러시아나 폴란드, 독일 등으로 가는 것을 지원할 만한 상황이 안되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근대 이후 '라트비아인'이라는 말은 무조건 교육을 받지 못한 '농노와 소작인'을 일컫는 것이었다고 한다. > > 라트비아인들 사이에서도 그 교육받은 '독일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라트비아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이 점령했던 프러시아 영토내(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의 경우, 일부러 리투아니아인이 아닌 독일인들처럼 보이기 위해 독일어로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부모들조차 그것을 독일인들의 밑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해하여 묵인하곤 했다고 한다. > > 19세기 중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라트비아 학생 '크리샤니스 발데마르스(Krisjanis Valdemars)'는 그런 선입견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자기 방문 앞에 '나는 라트비아인이다'라는 '노골적인(?)' 구절을 붙여놓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발데마르스는 라트비아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라트비아 민족개혁운동의 선각자로 성장하였다. >----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6053|서진석의 <발트3국 이야기> 고등교육 받으면 독일인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