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타키아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라타키아 개선문.jpg|width=70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 [[고대]] 이름은 시리아의 라오디케아였고 [[셀레우코스 왕조]] 시절에 건설되었다. 당연히 라타키아도 라오디케아가 음운만 살작 변한 것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자유 도시로 선정되어 번영하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건설한 [[개선문]], 극장 등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때 일시적으로 로마령 시리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세베루스는 대도시 타이틀 및 마치 이탈리아처럼 간주되는 특권(Ius Italicum)[* [[https://en.wikipedia.org/wiki/Ius_Italicum|Ius Italicum]]. 이탈리아 밖을 마치 본국 이탈리아처럼 간주하는 특권이다. 그 곳 시민들이 자동으로 속주민에서 로마 시민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며, 시장 및 총독도 더 이상 속주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을 다스리게 되는 것인만큼 통치를 더 세심하게 해야 되었다. 물론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에는 의미를 상실했다.]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 시절 라오디케아는 4만명의 인구 및 대도시에나 있는 [[히포드롬]]까지 보유하며 번영했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Laodicea_in_Syria|Laodicea in Syria]] 중, 'During the Severan dynasty, a third century imperial dynasty of Rome from Syrian origins, the emperor Septimius Severus named with the title "Metropolis" the city in 194 AD and allowed the Ius Italicum (exemption from empire taxation) to Laodicea, that was later called a "Roman Colonia".' 및, 'Under Septimius Severus the city was fortified and was made for a few years the capital of Roman Syria: in this period Laodicea grew to be a city of nearly 40000 inhabitants and had even an hippodrome.'] 기독교적으로는 [[사도 바울로]]가 도시를 방문해 5명에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에는 황후 [[테오도라(6세기)|테오도라]]를 기리는 의미에서 종전 제1 및 제2 시리아 속주의 일부를 분할해서 테오도리아스(Theodorias)라는 새 속주를 만들었는데 그 치소로 지정되었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Laodicea_in_Syria|Laodicea in Syria]] 중, 'Justinian I made Laodicea the capital of the Byzantine province of "Theodorias" in the early sixth century. Laodicea remained its capital for more than a century until the Arab conquest.'] 그러다 636년 [[이슬람 제국]]령이 되어 아랍식 이름인 알-라디키야 (اللَّاذِقِيَّة)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레바논 현지의 기독교 반란군인 마르다이트가 705년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칼리파 [[왈리드 1세]]와의 협상으로 철수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후 719년 재차 라타키야를 습격하였다. 그후 칼리파 [[우마르 2세]]가 도시를 재건하였다. 970년 [[요안니스 1세]] 휘하의 [[동로마 제국]]은 약 3세기만에 도시를 수복하였으나 10년만에 [[파티마 왕조]]에게 상실하였다. 11세기 중엽 파티마 조가 쇠퇴하자 1074년 잠깐 동로마 군이 수복한 것을 제외하면 1080년대 [[샤이자르]]의 바누 문키드가 도시를 지배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1차 십자군]]을 틈타 1097년 10월 도시를 마지막으로 수복하였고, 1099년 후에 [[트리폴리 백국]]을 세우는 레몽 드 생 질이 그 대리로 통치하였으나 1103년 [[안티오키아 공국]]의 탕크레드에게 상실하였다. 그후 안티오키아 공국령에 속했으며, 여러 성당이 지어졌다. 그 중 예수 성심 성당은 지금도 남아있다. 당시 이름은 '라 리셰 (La Liche)'였다. 1188년 여름 [[살라흐 앗 딘]]이 점령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알레포]] 번국에 속했다가, 1260년 [[몽골 제국]]의 시리아 침공 시에 [[훌라구 칸]]이 자신에 복속한 [[보에몽 6세]]에게 라타키아-자블라를 하사하며 80여년만에 안티오크 공국령이 되었다. 다만 1287년 지진으로 성벽이 붕괴하였고, 같은해 4월 맘루크 술탄 [[칼라운]]이 도시를 기습 점령하였다. 그후 14세기 [[키프로스 왕국]]의 습격을 받은 후 라타키아는 중소 도시로 남았다. 그러다 [[오스만 제국]]의 해체 이후 이어진 [[프랑스]] [[위임통치|위임 통치기]]에는 [[알라위]] 국가의 수도가 되어 재차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1920 ~ 1936년) [[시리아 내전]] 시에는 [[러시아 공군]] [[기지]]가 [[도시]] 근교에 위치하게 되었다. 2023년에는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지진]] 피해가 발생했다. [[분류:시리아의 도시]][[분류:시리아의 옛 수도]][[분류:휴양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