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이프치히 (문단 편집) == 역사 == [[드레스덴]]과 마찬가지로 본래 슬라브족의 거주지로 건설되었으며, 명칭은 슬라브어로 '보리수가 서 있는 곳'을 뜻하는 Lipsk에서 따왔다. 역사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015년으로 [[2015년]]으로 정확히 천년이 된다. 오랫동안 [[베틴 가문]]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으며 1409년 [[마이센(독일)|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 1423년 [[지기스문트]] 황제로부터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작센)|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에 의해 [[라이프치히 대학교]]가 설립되고 나서 [[법학]]과 출판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영향으로 분단 이전 [[독일 제국]] 대법원이 [[베를린]]이 아닌 라이프치히에 위치해 있었으며 출판업의 경우 동독 시절을 포함한 오늘날까지도 라이프치히 도서 박람회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나치 시대에는 Reichesmessestadt Leipzig가 공식 명칭이었는데, 이는 제국박람회도시 라이프치히 라는 뜻이다. 분단시기에 동독과 서독에 각각 하나씩 생긴 독일 기록보관 도서관의 동독쪽 도서관이 라이프치히에 생겼으며[* 서독쪽은 프랑크푸르트], 통일 후 2006년에 독일 국립 도서관 (Deutsche Nationalbibliothek, 약칭 DNB)로 개칭되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가 이 근처에서 벌어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산업화 시기에 들어서면서 라이프치히는 [[독일 연방]]뿐만 아니라 [[중유럽|중부 유럽]]의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했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독일]]에서 가장 큰 중앙역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작센 왕국]] 시기였던 이 때 라이프치히의 경제가 크게 발전했고 이는 음악에 대한 후원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전에도 바흐가 이 곳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이 당시 라이프치히는 독일 음악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개요에 언급한 대로 독일 음악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음악가들이 이 도시를 거쳐갔으며 특히 [[펠릭스 멘델스존]]이 1843년 이 곳에 설립한 음악원은 현존하는 독일 음악 대학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라이프치히 음악연극대학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라이프치히도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으나, 그 피해는 '''[[드레스덴 폭격|말 그대로 녹아버린]]''' '''[[드레스덴|이웃 도시]]'''에 비하면 미미했다. 도시 자체는 1945년 4월 19일 미군이 먼저 입성했으나 종전 이후 소련군 관할 지역이 되어 동독에 속하게 되면서 라이프치히의 무역업, 운수업은 [[시망]] 상태가 되어 버렸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건물들도 피해를 적게 입었으면서도 동독 당국에 의해 철거를 당하게 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래도 동독 제2의 도시로 남아 있기는 했었다. 개요에서 서술한 대로 [[1989년]] 9월 [[동독]] 정권을 무너뜨린 비폭력 시위가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동서독 통일]] 이후에는 도시 재정비 사업과 산업 재건 정책으로 과거의 명성을 어느 정도 되찾아가고 있다. 특히 2010년대 들어서는 'Hypezig'라는 별명[* Hype는 영어로 입소문이라는 뜻이다.]까지 생기며, 예술과 문화의 새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고, 점점 통일 직후의 특색이 바래 간다는 과거 [[베를린]]의 이미지를 슬금슬금 넘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