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오수스 (문단 편집) === 중일전쟁 시기 === 1938년 2월, 라오수스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반침략대회에 참석해 자오젠성(赵建生)이란 필명으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중국 노동자계급(为自由和平而战的中国工人阶级)〉이란 글을 발표해 일본의 중국 침략을 성토하고 영국이 중국 인민을 위해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후 1939년 11월 중국으로 귀환해 중국 공산당 동남국 부서기를 맡았다. 그런데 [[환남사변]]이 벌어지고 있던 1941년 1월 9일, 신사군 부지휘관 샹잉(項英)과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이 국민혁명군의 공세로 위기에 처한 신사군 군영을 떠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라오수스와 예팅(葉挺)은 두 개의 전보를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한 전보는 "상황이 위급하니 국민당과 협상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또다른 전보는 라오수스가 샹잉을 대신해 신사군 부지휘관을 맡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1월 11일,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마오쩌둥은 신사군이 예팅과 라오수스의 명령에 복종해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신사군이 국민혁명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 희망이 보이지 않자, 라오수스는 예팅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 적과 담판을 벌여 신사군 장병들이 장쑤성 주둔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보라고 요구했다. 예팅은 처음엔 거부했다가 나중엔 강권에 못이겨 담판을 하려 국민당 진지로 내려갔다가 억류되었다. 그 후 국민혁명군은 1월 12일 총공세에 나섰고, 1월 14일에 전투를 마무리했다. 예팅을 비롯한 3천명의 신사군이 포로 신세가 되었고 최소 3천에서 최대 7천명이 살해되었다. 불과 2천명만 간신히 탈출해 장쑤성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중엔 라오수스도 있었다. 1942년 3월, 라오수스는 중부 중국 관리국 서기와 신사군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중부 지역의 공산당, 정부, 군대가 라오수스의 관할에 들어갔지만, 그는 자신이 전투 경험이 부족하고 리더십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중앙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저는 도덕적 측면에서 깨끗할 수는 있지만 유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군사적 재능과 도덕을 모두 갖춘 중앙 간부들이 우리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에 중앙위원회는 천이(陳毅)를 파견해 라오수스와 함께 신사군의 군사 작전을 이끌게 했다. 또한 그는 옌안에서 [[정풍운동]]에 참여해 마오쩌둥의 독재 권력이 구축되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천이와 라오수스는 얼마 안가서 반목하기 시작했다. 천이는 군대를 이끌어본 경험이 일천하고 예팅더러 억지로 국민당과 담판을 짓게 하다가 포로가 되게 만들어버린 주제에 자신은 살아돌아온 라오수스를 경멸했고, 그가 신사군의 정치위원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어떻게든 축출하려 했다. 신사군이 황화당(黄花塘)에 주둔했을 때, 천이는 라오수스가 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정풍운동에 참가하러 옌안으로 간 틈을 타 장교들을 소집해 라오수스와 중부 중국 관리국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탄전린(谭震林), 뤄빙후이(罗炳辉), 쩡산(曾山), 장아이핑(张爱萍), 반한년(潘汉年) 등과 함께 중앙위원회에 라오수스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 1943년 10월 16일 옌안에서 귀환한 라오수스는 천이가 자신을 음해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후 중부 중국 관리국과 장원이(张云逸), 라이촨주(赖传珠), 증생(曾生) 등 장교들은 중앙위원회에 1500자 전보를 보내 천이를 대신해 신사군의 군사적전을 주재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일부 간부들은 천이를 비판하기 위해 공동으로 중앙위원회에 전보를 보냈다. 라오수스는 자신의 관할하에 있는 간부들이 중앙위원회에 직소한 것에 대해 "그들의 행동을 왜 막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받자 "그들의 분노가 너무 강렬해 금지하고 수정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중앙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천이가 정치 책임자가 없을 때 장교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개인적으로 중앙정부에 그를 대체할 것을 요구한 것은 명백한 분란 행위라고 판단했다. 얼마 후, 중앙위원회는 천이를 옌안으로 소환해 제7차 전국대회에 참여하여 자아비판하게 했고 장원이를 신사군 사령관에 임명해 라오수스와 함께 신사군을 이끌게 했다. 또한 천이와 함께 라오수스를 공격했던 신사군 장교들은 공동으로 자아비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45년 6월, 라오수스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7번째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끝난 뒤 산둥 군사지역의 신사군 정치위원과 중국 산둥 공산당 대표를 역임했다. 또한 그는 1946년 초 베이징과 북동부 중국 공산군에 소속되어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군사조정 작업을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