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스푸티차 (문단 편집) === [[독소전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19.egloos.com/d0056023_4dc67eb6c37cc.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라스푸티차/ras3.jpg|width=100%]]}}} || 라스푸티차라는 단어를 가장 널리 알린 사례이다. [[1941년]] 4월, [[나치 독일]]은 무솔리니의 삽질을 수습하기 위해서 발칸 반도로 [[그리스 침공|정예병력을 파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라스푸티차 때문에 같은 해 가을 무렵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리라 생각하지 않고 경계심을 풀었다. 이 덕분에 독일군은 소련 중심부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11월 [[모스크바 공방전]]이 벌어지던 중에 라스푸티차로 길이 모두 엉망진창으로 변한 탓에 [[독일 국방군|독일군]]은 공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1941년 겨울의 라스푸티차는 찾아온 한파와 함께 소련이 승전하도록 도와준 중요한 자연 속 조력자였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는 독일 국방군 출신자들의 주장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한파와 라스푸티차가 결정적 요소가 되긴 했지만 단지 그 두 가지만이 독일군이 패전한 이유 전부는 아니었다. 독일군이 지나치게 빠르게 진격한 탓에 보급선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데다가 소련군이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라스푸티차 시기 이전부터 독일의 강력한 기갑사단들이 연료부족으로 주저앉아 [[공세종말점]]에 다다르던 참이었다. 궤멸되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하는 소련군, 독일군이 점령지에서 자행하는 [[인종 청소]]에 대경실색한 소련 인민들[* 원래 동유럽 소련 구성국들은 연방정부에 매우 불만이 많았다. [[발트 3국]]은 전쟁 1년 전까지만 해도 독립국이었다가 소련에 강제로 병합되었고, 체첸은 스탈린이 자치권 보장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우크라이나 지역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인해 300만 명이 넘게 사망했다. 러시아라 해도 사정이 크게 달랐던것도 아닌것이, 우크라이나나 캅카스와 인접한 지역도 마찬가지로 대기근의 피해를 받았고, 또한 대숙청으로 피해를 본 사람과 그 친척, 가족까지 합치면 엄청난 수였다. 따라서 [[제노사이드]] 시행 이전에는 아예 점령지 주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했을 정도로 크렘린에 반감이 컸다. 그래서 이들을 잘 타일렀다면 러시아 일부지역에서도 안정적인 통치를 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독일군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현지인들이 그 이상으로 분노할 만큼 학살을 자행했다. 이 탓에 반독 [[게릴라]] [[민병대]]가 조직되기도 하고, 그나마 있던 친독반소 민병대도 반독반소로 양면전에 들어갔다.]이 저항하자 독일군은 발이 계속 묶였고, 그 영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독일군은 지나친 낙관론에 빠진 나머지 [[바르바로사 작전]]의 핵심인 속도와 길어지는 병참선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겨울이 다가오며 라스푸티차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보급로는 개판이 되고 [[보병]] 이동은 마비되어 안 그래도 느려지던 독일군 진격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게다가 독일군은 개전 초기에 모스크바를 방치하고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공략하는 데에 집중했는데, 이 때문에 소련군은 전력을 재정비하고 조직적으로 저항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얻었다. 여기에 독소전쟁 첫 해인 1941년에 겨울이 예년보다 일찍 찾아오는 바람에 독일군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소련의 겨울'''에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동계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독일은 소련의 반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은 전략적으로 실패하였고,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했음을 기점으로 독일군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났다. 결론은, 라스푸티차와 동장군을 과소평가한 것 외에도 소련군의 병력 규모와 저항을 과소평가한 것, 슬라브족 거주지역에서의 제노사이드로 민사작전을 완전히 말아먹은 것 등이 독일군 패전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라스푸티차는 자연현상인 만큼 인간의 국적 따위를 가리지 않으므로 [[소련군]]에게도 골칫거리였다. 그래도 이들에게 라스푸티차는 연례행사마냥 매년 찾아오는 일상이었기에 광폭궤도와 통나무로 그나마 대비할 수는 있었다. 물론 이런 준비를 갖춘 소련 역시 공수전환이 된 뒤에는 라스푸티차 기간에 곤죽처럼 변한 땅 위에서 진격하기를 매우 힘들어했다. 독일군 역시 나중에는 통나무 다리를 놓는 방법으로 진탕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는 생소한 자연 현상이기도 했고, 공격자가 거의 일방적으로 불리한 환경인지라 적어도 초기에는 혼돈의 도가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라스푸티차가 올 때면 공세를 포기하고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소련군과 게릴라들에게 습격을 받아 전력을 많이 손실하였다.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에 따르면 사람들이 말 그대로 진흙에서 수영을 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 전장이었던 곳들은 지금도 땅만 파면 독소전쟁 당시에 사용되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의 장비들이 튀어나온다. [[2002년]]에 늪 속에 있는 [[3호 돌격포]]를 인양하거나 [[ISU-152]]를 끌어내서 움직일 수 있게 복원까지 한 사례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